• 움오름교회

2019.05.05 움오름 주일 설교 - "증언하느니라" (요 15:21-27)

2019년 5월 7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5:20-27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설교문


1. 상술과 거짓말


정육점 주인 남자는 오늘 기분이 좋았습니다. 닭고기가 한 마리만 남고 벌써 다 팔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인 것 같았습니다. 남은 한 마리만 팔리면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가게에 들어오더니 닭 한 마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닭을 냉장고에서 꺼내와 무게를 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칠천 원입니다”


“음… 좀 작은 것 같은데요. 좀 더 큰 걸로 주세요”


여인의 요청에 정육점 주인은 닭을 갖고 냉장고로 들어가 잠시 머문 다음 같은 닭을 가지고 나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조금 큰 건데 팔천 원입니다”


그때 여인이 말했습니다.

"그럼 두 마리 다 주세요”


……


만약 여러분이 정육점 주인이라면, 두 마리를 모두 달라는 고객의 요청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


20여명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는지를. 각자의 하는 일과 관심사에 맞게들 대답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의도에서 증권일을 하고 있는 한 형제는 “저는 존재하지 않은 또 다른 닭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 않고 다른 것달라고 했을때 그냥 6천에 가져가라고 했을듯 하고요. 만일 저 상황이라면 집 주소를 물어보고 배달해 준다고 하고 옆집 정육점에가서 한마리 빌려서 팔겠습니다”라며 부가적인 설명을 더 했습니다. 그것은 ‘공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없는것을 들고 온 순간부터 공매도 상황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대답하신 분들 중에 어떤 분은 정직하게 이실직고하겠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대부분 성경적인 답변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두 마리 밖에 없는데, 한 마리는 퇴근할 때 우리집에 가져가기로 해서 드릴 수가 없습니다.”였습니다.


순간 위기를 모면하는 위트가 빛나는 답변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평소 가족들을 생각하는 그분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가족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용이하다고 여기는 세태의 반영같기도 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술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지는 수많은 거짓과 술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술로 포장한 거짓이 장사에만 있을까요? 이 땅의 교회는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수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정직 그 이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만 대면 아는 몇몇 교회들에서는 실정법을 어길 뿐 아니라, 교묘한 거짓말과 행위로 가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차로 5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한 대형교회 목사는 목사 자격, 허위 학력 의혹, 논문 표절 등의 논란을 일으켜 왔습니다. 그 결과 지난 4월 25일 대법원은 2003년 그의 목사위임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시작이 거짓이었기에 현재 담임목사직 또한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으로 그의 자격 논란이 종결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속한 교회의 당회는 4월 25일 밤늦게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판결 결과에 "대단히 아쉽고 유감스럽다"면서도 "교회 사역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대법원 선고 결과를 예측하고 미리 안전장치를 마련해 뒀습니다. 교인 96.4%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재신임을 통과시켰을 뿐 아니라, 지난 3월 25일 임시노회에서 문제의 당사자를 목사로 재결의했습니다. 아무리 외부의 적이 있으면 내부가 단결한다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드러난 거짓말쟁이에 대해 교인 96.4%가 지지했다는 이 결과가 말이 됩니까?


저와 가까운 한 부부도 96.4% 교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몇달 전 주일예배 시 해당 목사가 했던 설교 중 한 문장 “마음이 중요합니다”(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모략’ 인용글)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며 제게 예배시간 찍은 해당화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배울만치 배운 박사학위자요, 대기업 임원을 역임했던 분이 추구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짓을 덮기 위해 더 큰 거짓과 편법으로 장사를 하며 그것이 성공한 목회사역이라고 교회가 떠들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세상이 흔들 수 없고, 흔들리지도 않는다"며 비전을 계속 감당하겠다고 발표하는 해당교회의 태도가 역겹고 슬프기까지 합니다. 교회는 어느덧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집’으로 이렇게 떨어져 가야하는 걸까요?




2. 증언하라


오늘 본문 속에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를 향해 하신 주님의 말씀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외면받고 핍박을 당하셨듯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핍박을 받게 될 게 될 것이다는 예언입니다. 둘째,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 핍박을 받으리라


본문의 시작인 20절은 헬라어 원문에도 2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2문장은 “기억하라”로 시작하는 명령문과 ‘만약’이라는 가정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격언(‘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을 기억하라고 명하시며 높으신 당신께서 핍박을 받으셨은즉 주님을 따르는 이들도 필연적으로 핍박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만약’이라는 가정문을 통해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핍박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의 말도 수용하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명령문에 이어지는 가정법이 따로 인것 같지만, 실은 연관성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란게 갑자기 하늘에서 “믿어라”는 소리가 들려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에 굴하거나 함몰되지 않는 것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고 핍박받는 이의 삶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그 만큼 더 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핍박의 필연성과 이로 인한 복음의 확산에 대한 주님의 예언은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이 되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하는 그 고난과 핍박이 주님과 무관한 고난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함석헌 선생은 신앙 밖으로 확장하여 고난과 핍박의 효용성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써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사람은 사탄의 적수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가지만 영에서는 점점 더 닦아 낸다. 고난이 주는 손해와 아픔은 한때나, 그 주는 보람과 뜻은 영원한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함석헌 <너 자신을 혁명하라>, p.145)



2) 증언하라


‘가치’라는 것은 사물이 지니고 있는 값이나 쓸모를 말합니다. 나아가 인간이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지니게 되는 중요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가치는 곧 값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치는 평소에는 값으로 잘 매겨지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선택해야 할 시점에서 그것이 얼마만큼의 값어치가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요? 현재 우리의 신앙을 무게로 달 수 있는 것은 존재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지는 신앙과 다른 것을 선택해야 할 자리에 놓이면 그 값어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두 약속이 겹쳤습니다. 동일한 시간대이기에 하나를 취소할 수 밖에, 또는 양해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어떤 약속을 취소하거나 양해를 구합니까? … 덜 중요한 약속입니까? 아니면 덜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입니까?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누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 무엇에 더 값어치를 두는지가 드러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면 우리가 하는 선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어떤 신앙인인지를 보려면 이 또한 우리의 선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략 90년 전인, 1928년 이후 미국 경제가 밑바닥 까지 침체되어가고, 많은 기업체들이 도산하며, 실업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사회는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던 대공황 때였습니다. 대학에 다니던 한 사람이 아버지의 제안대로 뉴욕 상호 보험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NBC스튜디오에서 부른 노래로 정기 출연을 요청받았습니다. 갑자기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많은 돈을 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극심한 경제적 침체로 학업까지 중단한 그였기에 이 기회를 꼭 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행여나 아들이 라디오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세상에서 출세 했을때의 위험을 내다보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서 부를 찬송을 연습하던 그에게 어머니가 10여년 간 애송하던 시카고 나사렛 감리교회 뤼 뮐리 목사의 부인(1922년 작시)의 시가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감동으로 가득 찬 그의 목소리로 그 시를 노래했습니다. 부엌에서 이 찬송을 듣고 있다 달려와 두 팔로 아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교회에서 처음으로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오늘날까지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 없네"


가장 어려운 때에도 예수 믿는 신앙을 선택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에 직면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 1:18 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런데도 주님은 그 어리석은 길로 우리를 “걸으라” 하십니다. 걸으라는 그 부분을 오늘 본문 26절, 27절에선 반복해서 “증언하다”라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증언하다’라는 헬라어 μαρτυρεῖτε(마르튀레이테)는 ‘증인’이라는 헬라어 μᾰ́ρτῠς(마르투스)와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그 원뜻은 ‘순교자’입니다. 진정한 증인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걸면서 그 가치를 증언한다는 의미입니다.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R. F. Miller 작사 · G. B. Shea 작곡)의 원래 영문가사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 pierced hand.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예수 가지리

큰재물 갖는 것보다 주예수의 것 되겠네

큰집이나 넓은 땅보다도 차라리 주예수 가지리

나는 차라리 주님의 못박힌 손에 이끌리어 가리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과의 선택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선택의 순위에서 주님이, 주님의 말씀이 밀려나고 있다면, 증인은 고사하고, 나의 신앙의 상태를 심각하게 되돌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증언하는 교회, 증언하는 가정


가끔 법정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쌍방이 첨예한 법정공방을 가지다 결정적인 증인이 등장했을 때 ‘게임 끝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 증인의 증언에 대해서 어찌 할 수 없을 때 증인의 과거의 전력과 범법행위들을 찾아내 열거합니다. 그래서 그 증인의 증언 자체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결국 증인으로서 효력을 상실케 만드는 것을 자주 봅니다.


증인의 삶이 증언의 신뢰를 위해 중요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들의 삶이 더 없이 중요합니다. 앞서 첫부분에서 나눴던 이야기처럼 ‘상술’이라는 이름으로 ‘상도’를 져버린 장사가 오래 갈 수 없듯이, ‘지혜’라는 이름으로 기만을 일삼는 교회는 증인 공동체로서의 삶을 져버린 것입니다.


어제 저녁무렵 친구가 심방가서 교우들에게 물어보았다며 이렇게 문자를 보내 왔습니다. “닭 한 마리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으니 이 닭만 가지고 가라고 한다.”


그 친구는 그 전날 두말없이 “Honesty is the best policy. 난 이실직고 하겠네”라고 답했던 친구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어제 한 네 말대로 '정직하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낫겠니? 아니면… 오늘 심방시 들은 말처럼 '한 마리는 예약되어 있으니, 한 마리만 가져가라'는 말이 낫겠니? … 내가 아는 너는 당연 '정직'이라고 하겠지! … 대답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이더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보이더라…”


왜 우리는 “그럼 두 마리 다 주세요”라는 말 앞에서 우리의 지난 잘못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지 못할까요? 왜 그것을 융통성없다라고 이야기 할까요?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우리 삶이 이미 많은 부분에서 오염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은 가족주일입니다. 가족은 사랑으로 맺어지고, 혈육으로 이뤄지고, 또 신앙으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가족은 사랑 공동체이기도 하고, 혈육 공동체이기도 하고, 또한 신앙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비춰본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이 모든 우리의 공동체는 ‘증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운전하다가 또는 길을 걷다가 보는 광경 중에 가장 이해가 안되는 것이 엄마나 아빠가 아이를 손을 잡고 무단횡단하는 것입니다. 좋게 봐서 혼자서는 어쩌다 할 수 있다가 칩시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아이의 손을 이끌고 차도를 가로지른다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아이가 편의를 위해 불법을 일삼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똑같이 배워간다면 이는 더 위험한 일 아니겠습니까?


어떤 아버지는 혼자서는 과속도 하고, 때로 신호도 어기기도 하지만, 가족을 태우고서는 절대 준법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아빠의 운전을 보고 그대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부모 세대가 하는 한 행동 행동이 자녀세대에게 삶을 살아가는 시범이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혈육적 공동체, 신앙적 공동체인 가족을 제대로 세워가길 원한다면, 우리 신앙의 값어치를 올바로 매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살아내는 증인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값어치를 정하는 그 일이야 말로 가족을 어떤 토대 위에 세워가느냐란 과제와 직결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것이야말로 나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도 걸어 우리의 가치를 매기신 주님을 향한 증인으로서의 마땅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받는 고난과 핍박이 예전의 우리 선배들의 것에 미치지는 못하나 그래도 참고 견디는 것을 통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확산되어 감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은 하시라도 빨리 떨쳐 버려야 할 것들이 아니라, 우리를 더 하나님을 닮은 성품으로 세워주고, 우리 속에 관대함이 자리할 공간을 넓혀주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나아가 이런 삶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되게 하심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선택의 순간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우리는 언제쯤이면 주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는 증인이 될까요? … 5월의 첫주, 가족주일을 맞아 혈연과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본분을 다하고 있나 돌아보니 부끄러움은 모두 우리의 몫이 됩니다.


이 땅의 신앙공동체라고 하는 많은 가족이, 교회가 본연의 길을 잃고 허약한 세속가치 위에 속성으로 집을 지어 가려 합니다. 주님~ 비옵나니 이 땅의 교회를, 가족들을 되돌려 주님을 증언하는 공동체로 바로 세워 주옵소서. 선택의 자리마다 주님께 최고의 값어치를 두는 진정한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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