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4.28 움오름 주일 설교 - "기도해 주십시오"(롬 15:30-33)

2019년 5월 6일 업데이트됨





로마서 15:30-33 (새번역)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설교문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의 수신인인 로마교회는 사도바울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로마교회가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2장10절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에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수 많은 사람들 중에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 행2:10-12 (새번역)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이들이 로마로 돌아가 그 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수고한 결과 로마에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에 로마서편지를 보냈을 당시, 로마교회는 이미 규모가 상당히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A.D. 60년경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무수히 많은 성도들’이 순교했다는 당시의 증언을 미루어보아 로마에는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으며, 로마서에 언급된 인물들의 대부분이 로마나 그리스 출신임을 볼 때, 이방인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은 전체적으로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간략히 밝히면서 앞으로의 로마 방문 계획을 알리고 기도를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밝히는 로마서를 쓴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따라 로마교회 성도들이 알고 있는 바를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15절). 그리고 그동안의 사역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 지방에서는 더 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합니다(19절, 23절). ‘일루리곤’은 마케도니아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에 해당하는데,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 반도를 마주 보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바울이 로마서를 쓸 시기는 바울의 지중해 동부 연안의 사역이 종결되는 무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의 내용과 대조해 볼 때, 로마서가 기록된 시점은 A.D. 53-57년까지 계속 진행되었던 3차 전도여행을 마칠 무렵인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에서 약 3개월을 머물던 기간에(행20:3)에 로마서가 기록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주로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당시 세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지중해 서쪽 끝 스페인으로 나아가려는 계획 가운데 로마를 방문하고 싶다는 계획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한 중보기도 내용으로 3가지 기도제목을 요청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30절/새번역)


(1)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31절a)


먼저 극렬한 유대인들로부터 화를 당치 않고 안전하도록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가 이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 피하고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다른 곳에서의 바울의 진술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를 떠나 3차 전도여행의 목적 기착지인 예루살렘을 목전에 둔 ‘가이샤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뭅니다. 이때에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 심지어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바울을 동행해 왔던 ‘누가’조차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간곡히 말렸지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행21:12-13/새번역)


바울의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로부터 화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도요청은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자신의 사명에의 자각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내내 가장 큰 위험은 실은 극렬 유대인들로 부터의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바울을 죽이려 한 것은 바울을 배신자, 이단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의 유력자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당하거나 잃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바울은 그들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제거해야 할 존재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정황을 모르지 않았으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걸음을 미루거나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 “그리고 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1절b)


바울은 왜 이런 기도를 요청하고 있을까요? 처음 이 기도제목을 접했을 때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기에 이것이 무엇 그리 중대한 기도제목거리라고 중요 대목에 등장하는가라는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제목 이면에는 당시 교회 내의 분위기가 여러 가지로 중첩되어 보입니다.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바울은 그가 세운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기부금을 모금하면서 아래쪽 고린도에까지 내려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이 자신이 이방인 성도들로부터 모금한 구제 헌금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그 구제 헌금을 제공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주 안에서 한 형제로 여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연하고 바른 복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기도제목을 내는 것을 볼 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이방인의 개종을 탐탁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방인을 부정한 존재라고 거부하는 유대전통의 고정 관념과 관습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혹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모금하여 보낸 기부금을 받지 않는 다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제목은 복음의 보편성, 교회의 하나 됨이라는 면에서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특별히 중보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3)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2절)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 할 때 기쁨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했습니다(32절a). 이를 위해서는 먼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마무리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자신이 로마교회를 방문 했을 때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마음아파 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로마교회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그가 머물고 있는 고린도교회는 그동안 그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고린도교회가 2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바울이 오늘날의 터키 지역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물 때에 고린도교회 내부에서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이를 전해들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그는 편지에서 “내가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고전4:21)라고 심하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질책합니다. 이렇듯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핍박 중에도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는 로마교회만큼은 기쁨으로 그들과 만나고, 또 그들에게 나아가는 그 일이 기쁨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바울의 이 기도제목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삶이 말씀 안에서 거룩하기를 소원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아마 바울이 이 부분에 더 마음 졸이고 간절하였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날마다 꿈에서라도 그려보고, 또 그렇게 그려보는 만큼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로마라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제국의 문화의 중심부, 세계 권력과 폭력의 한 복판에서 온갖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자생적으로 생겨난 연약한 교회가 쓰러지지 않고 굳건하게 자라고 서가기를 그가 얼마나 염려하며 기도했을까요. 그리고 제국의 세력 속에서 그들이 부서지거나 흡수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예쁘게 성장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고대하였을까요. 이러한 마음은 로마교회를 향해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는 질책과 협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만났을 때 자신의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이 예쁘게 자라가고 있기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기도 제목 속에서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절절한 사랑이 녹아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를 향한 이러한 마음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또한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와의 만남을 기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에는 로마교회 성도들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 또한 있었습니다.(32절b)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너무나 멀고 험난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 보인 속내에서 그의 험난한 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 고후11:23-27 (새번역)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달라는 그의 이 기도요청은 그것을 읽는 이의 마음속에 너무나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그 짧은 문장 속에서 그의 두 어깨가 짊어진 짐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수많은 중보기도 모임이 있고 또 성도들 사이에서는 중보기도의 요청이 오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요청의 내용과 우리의 기도요청의 내용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요? 만약 간극이 있다면 그 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요? 우리의 중보기도요청의 방향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고 어디로 지향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단지 기도의 내용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신앙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와 태도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바울의 중보기도 요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말씀의 더 깊은 진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그 기도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하는 지점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르고 정당한 기도는 바르고 정당한 응답을 초래한다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바르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종 우리의 기준, 우리의 깊이와 크기에서 형성된 것일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의 생각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차이를 보일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때로는 신앙 현실이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모릅니다.


바울의 기도요청은 바르고 정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도 바르고 정당해야 한다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우리의 기대는 결코 잘못 된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앞서 있었던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을 살펴보면, 소아시아 지역에서 바울은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습니다(행16:7). 그러나 성령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 계획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밀리고 밀려 결국에는 험산준령의 ‘아마누스산맥’을 넘어 ‘드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누가’를 만나고 또 ‘이리로 건너오라’는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행16:10).


  • 행16:6-8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그렇게 성령에 이끌리어 소아시아 지역의 ‘아가야’에서 유럽의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건너간 첫 성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은 심한 매를 맞고 감옥에 수감됩니다(행16:23). 그 다음 도시 ‘데살로니가’에서는 유대인들이 폭력배를 동원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형제들이 밤에 급히 바울을 ‘베뢰아’로 도피 시켜야만 했습니다(행17:10). ‘베뢰아’에서는 말씀을 전하나 싶었으나 또 유대인들의 방해로 항구로 피신하여 ‘아테네’행 배를 타고 도피하였으며(행17:14),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를 피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 반도 남단 고린도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게 도착한 바로 그 고린도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이주해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행18:2). 바울은 아마도 이들 부부로부터 로마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가야,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레아, 아테네, 고린도는 애당초 바울의 전도여행 계획 속에는 결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거절하심과 그리고 급박하게 쫒기고 도피하면서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도여행 시작은 결코 잘못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자신의 명예를 위한 잘못된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전도여행의 출발은 성령의 역사였고 전적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가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전도여행의 여정은 살해 위협, 도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계획에 없었던 ‘고린도’에 까지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밀려온 고린도에서 ‘로마’를 향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계획과는 다른, 아니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저 위대한 바울의 전도여행을 향한 성령의 이끄심 이었습니다.



자, 이제 다시 본문으로 시선을 옮겨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간절하게 기도해 달라던 바울의 중보기도요청, 즉 기쁨으로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고 또 그들과 함께 즐겁게 쉼을 갖기를 바랐던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어떻게 응답이 되었을까요?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다시 들린 고린도에서 이렇게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고서는, 유월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들러 구제헌금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기한 내에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고린도항구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여 결국 배를 타지 못하고 다시 육로로 북상하여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행20:3).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고, 그가 바랐던 대로 ‘로마’에 가기는 하였지만, 이전 기도했던 기쁨과 쉼 모습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 결박된 채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2년간 연금 상태에 있다가 잠시 풀려났지만 다시 체포되었으며, 결국에는 참수형을 당하고 맙니다. 바울의 간곡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렇게 그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죽음을 앞둔 캄캄한 로마의 지하 감속 속에서 바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결국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 캄캄한 지하 감옥에서 이렇게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장 중)


저는 그의 마지막 편지를 보면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의 기도가 실은 가장 신실하게 응답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요청한 그의 간곡한 중보기도 내용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 일어나기를 바라는 모든 소망들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이미 중보기도 요청 속에 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으로 로마교회에 나아가며, 함께 편히 쉬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에 대한 응답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32절)


그가 생각했던 기쁨과 쉼이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기쁨과 쉼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전도여정 속에 일어난 일들, 그리고 일어나게 될 일들이 그에게 기쁨이었고 쉼이 될 수 있음을 그는 로마 감옥 속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신앙의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어떤 기도를 요청하시겠습니까.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할 때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응답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오늘, 나의 ‘기도해 주십시오’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말씀의 빛 아래 우리 자신을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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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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