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4.21 움오름 주일 설교 -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요 15:18-20)

2019년 4월 24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5:18-20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설교문


1. 사순절에 만난 렘브란트


여느 해보다도 훨씬 더 긴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고 맞이하는 부활주일 같습니다. 아마도 새벽부터 시작해서 자정무렵, 때로는 그것을 훌쩍 넘긴 시간까지 렘브란트의 그림을 붙들고 씨름했던 시간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때로는 수험생처럼 어느 곳에서나 책을 펴서 읽었고, 복잡한 시내버스 안에서도 자리만 잡으면 노트북을 꺼내 생각을 활자로 옮기던 반 미친 생활을 했습니다.


아마도 알고 다시 시작하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반면, 책에서 보았거나, 때로 유럽생활 중 가끔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렘브란트를 본격으로 만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작품들을 보며 어떤 생각의 통로와 생의 골짜기를 거쳐 그런 표현, 그런 느낌에 이르렀는지를 더듬어 가던 만남의 자리였습니다.


렘브란트와 이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네델란드 화가하면 생각나던 사람은 단연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다 고흐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두고 했던 말이 렘브란트를 다시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보름 동안 마른 빵 부스러기만 먹으며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내 삶의 십 년도 기꺼이 바치겠다”(*참고: 고흐가 감탄했던 작품은 ‘유대인 신부’)


고흐가 렘브란트 작품의 어떤 부분을 보고 그렇게 말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렘브란트가 당시대를 비롯해 전후 세대 화가들과 달랐던 부분 때문이었으리라고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의 특징은 시대의 관행을 넘어 자신 만의 느낌과 표현을 발휘했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바로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을 2번 방문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렘브란트 역시 예술 요건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형식적 짜임새와 내용적 실재성을 완벽히 갖추고 있습니다. 탄탄한 기본기 위에서 이뤄진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사건을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 그 사건 속의 한 인물이 되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때로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기도 했고,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탕자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축 늘어진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받아 안으며 한없이 통곡하는 니고데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탕자의 모습으로 1669년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젊은시절의 그의 작품을 보면, 루벤스(Peter Paul Rubens) 등과 같은 당시 유럽의 주요 화가들과 경쟁하려는 야망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유행과 렘브란트 자신의 내면적 기질은 스스로 그의 야망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고독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렘브란트 특유의 독자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깊은 감정 상태에 빠진 내면의 세계를 독특하고 생생하게 재현해 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렘브란트 예술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과 그림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그것은 빈센트 반 고흐를 매료시켰으며, 사후 35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의 작품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추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사순절 묵상을 나누던 가운데 몇 차레에 걸쳐 말씀드렸듯이, 렘브란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며 가슴에 묻어야 했고, 경제적 파탄을 겪으며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빈궁한 생활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렘브란트는 시대의 관행과 흐름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기법적이나 양식적인 면에 치중하기 보다는 작품 속에 가라앉는 의미의 침전물이 무엇인지 살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고, 그는 한물 간 화가가 되어 점점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아픔과 슬픔의 골이 깊어져 갈수록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 결과 성경의 문자 속에서 미쳐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의 그림 속에서 들려집니다. 나아가 오래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있었던 박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들려지는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애환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점점 더 하늘의 빛에 기대었던 그의 삶은 하나님의 빛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이정표가 됩니다.




2. 거하라, 택하다, 속하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예루살렘 모처에서 유월절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동편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는 길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요 15장에는 주요 동사가 3개 등장합니다. 그것은 <거하다, 택하다, 속하다>입니다.


주님은 요 15장에서 9번이나 ‘거하라’라는 동사를 사용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이란? 당신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택하다’라는 동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선택권과 주도권이 주님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택하심은 종과 주인의 관계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로서의 관계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선택은 과정 뿐 아니라, 결과까지도 책임져 주시겠다는 선택하신 이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속하라’라는 동사를 통해 택함받은 사람들이 소속의 변경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게 되고, 어떤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될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세상에 속한 이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핍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택하신 이들이 주님께 속하였기에 받게 되는 동일한 미움과 핍박에 관한 예고였습니다.


렘브란트가 사회의 기호와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았고, 내면의 부르심에 따름으로써 점점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버림을 받았듯이, 주님께 속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받게 될 당연한 결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쉽게 표현하자면, 주님으로 인해 받는 미움과 고난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는 의미입니다. 졸업하기 위해선 아무리 적은 1학점 짜리라 하더라도 필수과목은 반드시 이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 소극적 자세에서 적극적 자세를 취할 뿐 아니라, 당연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결국 이 땅에서 우리의 싸움이라는 것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관한 것이며,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누구의 사랑과 누구의 미움을 받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뼈아픈 실패와 배반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일제 강점기 수많은 목사들이 일본의 압제와 핍박에 굴복해 앞장서서 배교와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목사들은 자신이 섬기던 교회의 교우들에게 신사참배는 배교가 아니라는 교언과 더불어 배교를 권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 배교의 대세 속에서 끝까지 주님께 속해 있다가 미움과 핍박을 받아 순교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대표적인 분이 소양 주기철 목사입니다. 원래 이름이 주기복(朱基福)이었는데,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그리스도(기독)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로 ‘기철(基徹)’로 바꾼 분입니다.


이름처럼 신앙을 지키며 주님께 끝까지 속하기를 다짐했던 그분의 시 <일사각오>는 왜 주님 편에 서야 하는지를 자문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가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감옥 고통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는데, 그의 종이요 제자인 우리는 왜 면류관만 쓰려고 하는가?


끝까지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미움과 핍박을 온 몸으로 받던 주 목사님은 “오, 하나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끝으로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때 그분의 나이는 47세였고, 그 날은 1944년, 오늘과 똑같은 날인 4월 21일이었습니다.




3. 부활 신앙의 의미


온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치고 미움과 핍박 받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들 하나같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더 원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예수님을 믿는 삶,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미움과 핍박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을 무겁게 받아 들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을 반대로 적용해 보면, 우리가 현재 누구에게,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것 때문에 미움 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정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그 진리로 인해 차별받고 나아가 증오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정 그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따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형태의 갈등과 차별과 미움을 수용하며 견뎌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 오해받고, 때로 모함받더라도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고 극복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끝내 이겨 내시고 영광스런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신 주님께서 당신께 속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미움받고 고통받는 주님의 사람들을 눈여겨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 2:9을 배경으로 만들어져 한동안 거의 모든 모임 중에 불리던 축복송이 있습니다.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며…”라고 부르던 찬양인데,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 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볼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택함받은 족속,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기 위해서는 받아야 할 미움이 있고, 감내해야 할 차별의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 영혼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이고, 무관심한 우리 시대에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의미입니다.





4. 시름하는 동조자에서 증인으로


그런데, 예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처음부터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를 보더라도 떠돌이 설교자인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이들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공감하면서도 하나님 나라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기엔 위험부담이 크다고 느꼈기에 그들은 물질적 후원을 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지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목숨까지도 바치며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노라고 확언하던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그들은 비겁자처럼 보였을 겁니다. 복음에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생활에 매여 있던 사람들을 일컬어 헨리 나우웬은 ‘시름하는 동조자들’이라 고 명명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비웃거나 얕잡아 볼 수 없는 게 예수님의 십자가형과 관련하여 한 신앙 한다던 제자들이 모두 줄행랑을 쳤던 때 정작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시름하는 동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어제(토요일) 사순절 묵상 가운데 다루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당시 사법 당국에 의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큰 결단이었습니다. 사형당한 예수님과 연루되면 대제사장을 비롯한 동료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의 비난과 공격을 받아 지금까지 누렸던 것들을 모두 상실할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아무 이익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데도 어떻게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지지하던 ‘시름하는 동조자들’인 그들이 용기를 내어 나설 수 있었던 걸까요? 그것은 양심이 문제였습니다. 양심을 통해 참 사람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환장에 그들은 응답했던 겁니다. 그들의 양심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삶을 내어놓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주저함을 떨치고 일어나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갔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들의 모험에 의해 주님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의 내과의사겸 정신의학자였던 폴 트루니에(Paul Trounier, 1898-1986) 박사는 그의 책 <모험으로 사는 인생>에서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성향을 가지지만, 인간만은 유일하게 편안한 자리를 뛰쳐나와 모험을 추구하려는 본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적이 없는 시름하는 동조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양심에 따라 모험으로 나섰습니다. 단순히 양심에 따라 사람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 것을 드러냈다면,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어느 편에, 누구의 편에 속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이야기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렘브란트도 이 이야기를 얼마나 좋아했든지 같은 주제로 6차례에 걸쳐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어이없는 십자가 죽음을 보고 너무나 실의에 빠진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같이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시다 저녁때가 되어 어떤 집에 들어가 식사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함께 있는 분이 예수님인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들이 주님께서 기도하고 빵을 떼는 순간,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감격은 잠깐, 더이상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두 사람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생전 그토록 확신에 차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기점으로 실망에 빠져 각자 갈 곳으로 떠나갑니다. 그런데, ‘시름하는 동조자들’은 그 순간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그래서 엠마오의 식사는 인간의 신념과 확신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토대 위에 서 있는가를 확인케 합니다. 동시에 그 무너진 신앙을 주님께서 무엇으로 다시 세워주시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렘브란트의 <엠마오의 식사>는 당시의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지만, 렘브란트는 빛을 어둠 속에서 표현합니다. 어둠이 대부분인 배경 속의 빛은 비로소 빛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케 합니다. 만약 온통 빛으로만 노출되어 있다면 분명 우리는 빛을 빛으로 인식하지 못할 테니까요.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과의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저녁 식사의 한 장면으로 보입니다. 그곳엔 어떤 종류의 요란함도 특별함도 없이 말의 부재를 느끼듯 침묵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속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을 응시합니다. 요란하지 않기에 종교적이거나 환상적인 것이 아닌 일상적인 빛이 우리를 안도케 합니다.

너무 환한 빛은 우리 눈을 멀게 하기에 그 빛은 은은하게 스며 듭니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는 검은색은 우리의 상태를 가리키듯 앉은 사람들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내리 쬐는 적정량의 빛은 우리를 구원하는 색이 됩니다. 적당하게 내리 쬐는 그 빛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예배당의 종소리를 마냥 찢겨지고 상처난 마음을 보듬어 줍니다. 그리하여 다시 주님 편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힘을 줍니다. 바로 부활의 그 빛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긴 순례를 마친 뒤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마음으로 맞이하는 부활절.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고 아침공기를 들이 마시듯 생명으로 숨 쉬는 부활의 날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인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빛을 비춰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기쁨이요, 소망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희망을 두면서도 자주 초초해 하며 불안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던 ‘시름하는 동조자’입니다.

한편으로는 진리를 따르는 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은 괴로움에도 소중한 일상을 무덤으로 만들어 버리던 ‘고뇌하는 동조자’입니다. 믿음과 진리의 길에 충실하지 못했기에 자주 주님의 반대편에 서던 ‘배반하던 동조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런 저희를 불쌍히 보시고,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양심을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환장 앞에서도 모험으로 반응했던 ‘시름하는 동조자’를 보며, 동병상련을 느낍니다. 언제쯤이면 우리도 그들처럼 시름의 옷을 벗고 당돌하게 나설 수 있을까요? … 그 언제가 지금부터 이기를 바라며, 이제 우리도 ‘시름하는’에서 나아가 ‘동조하는’ 증인으로서 주님 편에 단단히 서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전해듣는 부활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부활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편에 서서 진리를 살아가는 것으로 때로 미움 받고 차별 받는 길이라 할지라도 부활의 소망을 지닌 사람으로 담담히, 그리고 당당히 겪어가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그렇게 부활의 주님에게 속한 사람으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9.04.21 봉헌기도 - 윤성천

엄숙하면서도 기쁜 부활주일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삶, 즉 주님의 택하심을 따라 세상과 구분되어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삶에 대해 돌아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렘브란트와 주기철 목사님 등 믿음의 선배들이 세상으로부터의 미움과 핍박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냄으로써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보여준 것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이 택한 족속, 왕같은 제사장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며 동행해 주시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셔서, 세상의 험한 파도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이 우리의 양심에 기대하는 모험에 담대하게 나설 수 있게 하옵시고, 증인으로서의 삶과 영혼을 통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저희들의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올립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쓰임받게 하시고 주님께 속한 심령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육신의 강건함과 가정의 화목을 지켜 주시고 아직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심령들도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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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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