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4.14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가 너희를 택하여"(요 15:16-17)

2019년 4월 19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5:16-17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문


1. 선택과 후회


대학수능시험 언어영역에 출제된바 있는 3개의 외국 문학작품 중의 하나인 R. 프로스트(1874-1963)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말하는 이 시는 단순히 어떤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선택을 되바꿀 수 있는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진술합니다. 그 결과 ‘가지 않은 길’, 그 포기에 대한 회한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은 선택에 따라 감내해야 할 부산물입니다. 단, 그 부산물이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 인간으로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회한’이라는 부산물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따라 인생에 대한 평가가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것과는 다르다고 사도 바울은 강론합니다. 롬 11:29입니다.

  •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다시 말해 그 선택에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은 진짜 후회가 없으시다는 것일까요? 아니라면, 후회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후회하신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씀일까요?




2. 하나님의 후회


시간이란? 흘러간 강물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며, 후회하거나 미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망각하고자 애씁니다. 그 와중에 후회가 생깁니다. 이러다 보니, 후회란? 약자의 습관처럼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후회를 하나님도 하신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창 6:5-7(쉬운성경)입니다.

  •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의 악한 행동이 크게 퍼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악할 뿐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든 땅 위의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키겠다. 사람에서부터 땅 위의 모든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멸망시키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다.”


창세기가 하나님을 후회하는 존재로 언급함으로써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 진술토록 허락하신 것은 무슨 의도일까요?


공자께서 이르기를 “일이 잘못되면 군자는 제 탓을 하고, 소인은 남을 탓한다.”(子求諸己 小人求諸人)라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적어도 하나님의 후회란? 남탓이 아니라, 당신책임으로 떠안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게 다 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해 마음 아파하시는 것(창 6:6)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후회는 과거에 대해 자책하고 잘못 판단한 선택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등진 채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괴로워하시는지, 얼마나 아파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후회가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 23:19입니다.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비교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성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거짓’과 ‘후회’와는 질적으로 다르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은 곧 우리를 향한 선택에서 드러날 뿐 아니라, 선택하신 부분의 철저한 이행에 의해 증명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에을 통해 선택에 대해 예고하셨을 뿐 아니라, 그 예언의 이행자가 되어 당신의 아들을 속죄와 화해의 재물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가 성경 전체의 주제요, 핵심입니다. 동시에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참 하나님 되게 하는 증거입니다.




3. 예수님의 선택


오늘 본문을 시작하며 주님은 당신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 또 그 목적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자신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해서 왔다고 자랑질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째든 예수님은 제자선택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선택의 주체가 주님께 있음으로 그 과정과 결과 또한 주님의 몫임을 말씀합니다. 고로 이 선택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회한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하느냐?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사람도 있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이 다른 종교로 갈아탔다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라고 말씀하시며 반론을 제기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생활의 2가지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완전히 하나님께 기울어 지는 것이 1단계의 구원생활이라면, 2단계는 구원받은 이후에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단계에서 기본을 익히고 단단하게 기초를 다지지 않은 상태에서 2단계를 살아가다 보니 어설프게 일어나는 배교의 현상입니다(마 13장의 씨뿌리는 비유로 보자면, 토양을 관리하지 않고 곡식을 심은 것의 결과).


선택에 대한 주님의 주관성과 절대성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이어 주님은 그 목적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그 열매로 인해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되는 것, 이 2가지 입니다.


이 2가지는 따로 인 것 같지만, 실은 ‘열매’로 연결된 하나입니다. 이 부분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16절을 유심히 다시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는 말씀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그 무엇’, 그래서 ‘다 받게 되는 그 무엇’이 어느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맺고 있는 열매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3월 초 아직 꽃샘추위가 머물고 있을 때 저는 집 주위의 벗나무, 살구나무, 감나무와 자두나무에 퇴비와 더불어 비료를 주었습니다. 곧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나무를 위한 영양분이었습니다. 제가 농부의 ‘농’자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얼마있지 않아 맺게 될 열매를 위해 나무에 영양분을 공급했다면, 인생의 농부되시는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는 순간부터 포도나무는 모든 것을 가지에게 공급해 줍니다. 자신의 진액을 쏟아 수분과 영양분을 아낌없이 가지에게 전해 줍니다. 동시에 농부되시는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위해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가지된 사람들’이 열매를 위해 무엇을 구하든지 누리는 은혜요, 은총입니다.




4. 선택하신 이의 책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당시 헬라 로마 세계가 갖고 있던 인간에 대한 통념과 인식을 넘어선 태도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도구나 종으로 살아가는 유희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신분의 변화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14절 - 15절 말씀입니다.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님은 우리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종과 주인의 관계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상호신뢰와 의존적 관계인 친구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당신이 선택한 친구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현재 ‘친구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이행되는 사순절의 신앙력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그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종려주일이요, 고난주간의 시작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동안 교회력 속의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실 것이고, 당신이 선택하셨던 제자들에 의해 비참히 팔려가고 배반당하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참한 고통 가운데 인간 예수로서의 생을 마치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고통과 눈물로 끝이 나도록 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게 하실 겁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선택하신 가지된 제자들이 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이끄시는 길이요, 책임을 다하는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5. 선택받은 이의 책무


그렇다면, ‘친구’로 부르신 주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책임져 주심을 누리는 제자된 사람들의 책임과 의무는 무엇일까요? 17절은 그 부분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고, 사랑을 다해 사랑하신 것은 결국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잡히시던 날 밤까지 누가 더 크냐로 다투던 제자들을 무척 부끄럽게 만드셨을 겁니다.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되돌아 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지난 4월 11일(화) 로마 교화청 내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산타 마르타)에서 있었던 한 사건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사랑의 길에 대해 빛을 던져 줍니다. 그날 게스트하우스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초청했던 남수단 정부 지도자들과 반대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전으로 돌아가지 말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평화를 위해 나아가십시오”


이 호소와 더불어 교황은 무릎을 꿇고 차례로 그들의 발에 일일이 입을 맞췄습니다. 교황은 오랜 내전으로 대립해온 남수단 정부와 반대파 지도자를 초청해 교황청에서 전날부터 이틀 간 영적 피정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피정을 마무리짓는 연설에서 교황은 "평화를 계속 유지하길, 앞으로 나아가길 형제로서 간청한다"며 "많은 어려움이 있을 터이지만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던 겁니다.


세상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보호를 위해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기 위해 상대방을 무릎꿇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드물지만, 이런 무릎꿇음도 있습니다. 어렵겠지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받은 이의 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무릎을 꿇으신 주님을 따라가는 고난주간…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할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받은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사랑할 줄 모르는 우리로 인해 마음 아프신 것은 아니신지요? 선택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했다고 자부하던 우리로 인해 안타까우신 것은 아니신지요? 빛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욕망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살아가는 우리로 인해 불편치는 않으신지요?


우리는 이렇게 욕망의 인력에 끌리고, 세속가치의 중력에 짓눌려 사랑의 샘물조차 고갈되어 살아 왔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로 우리 속에 풀풀 먼지나는 빈 두레박만을 들어 올리게 할 뿐 그들에게 시원한 물 한잔 내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실력과 형편을 고백드리는 종려주일, 고난주간의 첫날. 온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다 부둥켜 안고 무릎 꿇으셨던 주님 앞에 비옵니다. 주님의 그 마음 안에 우리를 심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속에도 누군가를 심을 수 있게 하옵소서.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위해 우리도 무릎 꿇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를 부르심에 후회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반응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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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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