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4.07 움오름 주일 설교 - "너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2-15)

2019년 4월 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5:12-15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설교문


1. 우정의 대명사? 관표지교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 그런 친구와의 우정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언급되는 것은 ‘관포지교(管鮑之交)’입니다. 우정의 대명사처럼 쓰인 고사성어의 배경은 고귀한 우정의 모본이 되어 훗세대에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줄곧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속의 두 사람(관중과 포숙아) 관계는 늘 포숙이 베푸는 일방적인 우정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관중은 줄곧 받았음에도 그 벗에게 무엇 하나 진심으로 되갚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포숙아의 절대적인 추천과 도움으로 20여년을 재상으로 잘 섬겼던 관중(管仲)이 병이 났을 때의 일화입니다. 제나라의 임금이었던 환공 (桓公)이 문병 와서 걱정어린 기색으로 물었습니다.


“그대의 병이 몹시 위중해 보여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묻겠소. 그대가 회복하지 못한다면 내가 누구에게 국정을 맡겨야 하겠소?”


관중이 말했습니다.

“임금께서는 누구를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잠시 생각한 뒤에 환공이 대답했습니다.

“포숙아(鮑叔牙)가 어떻겠소?”


관중이 대답했습니다.

“포숙아는 적당치 않습니다. 그는 선하고 청렴결백하기는 하나 자기만 못한 사람을 멀리하고, 남의 잘못을 평생 탓하는 성품입니다. 만일 그가 나랏일을 책임 진다면 위로는 임금님의 뜻을 어길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임금님께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포숙아에 이어 자신의 측근 3명(수초, 역아, 개방)에 대해서도 분명한 논리로 반대하는 관중을 향해 환공은 그럼 누가 좋을지에 대해 되물었습니다. 그때 관중은 자신의 정적과도 같았던 의외의 인물, 습붕(隰朋)을 추천했습니다.


관중의 입장에서 보면 선뜻 내키는 인물은 아니었을 텐데도 후임재상으로 천거하는 것을 본 환공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밀약이나 거래가 있지 않을까 의심했습니다. 그 결과 습붕 대신 되려 역아를 등용했습니다.


병든 자신을 대신해 포숙아를 기용하고자 하는 환공의 뜻에 반대하는 관중의 태도는 뜻밖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됨됨이를 알아주고, 이익을 양보하며 신뢰와 신의를 끝까지 지킨 포숙아는 관중에게는 은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숙아의 됨됨이를 차갑게 평하고, 그의 길을 막고 나서는 관중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한 것이라 평합니다. 포숙아가 비록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은인이지만, 국정과 우정 앞에서 공과 사를 명백히 갈라 친구와 나라를 모두 온전케 하려는 태도야말로 현인에 가깝다고 칭송합니다.

하지만, 관중의 판단처럼 포숙아를 국정에서 배제시킨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관중의 사후 나타난 결과가 그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죽은지 2년 후, 환공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2세들 간의 암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환공은 당시 병석에 있었고, 궁 안에는 이것을 통제하고 조절할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환관장 수초가 재상 역아와 공모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환공은 음식마저 공급받지 못한 채 그대로 굶어죽었고 시체마저 67일 동안 방치되어 썪어갔습니다. 이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지속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역사는 늘 ‘만약’이라는 부분을 불허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 자리에 포숙아와 같은 이가 환공 곁에 있었더라면 그런 비극적 반란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죽어가던 관중에 의해 중요 국정에서 배제되었던 포숙아는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안타까이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배경 이야기를 무게있게 적용해 본다면, 누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우정의 대명사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일방적 시혜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관포지교(管鮑之交)’를 기록해 둔 이유를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관포지교가 우정의 모본이어서가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일방적인 우정 앞에서도 사람은 결코 참된 우정을 되돌려 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2. 렘브란트의 <다윗과 요나단>


성경은 친구 사이의 우정에 대해 지체없이 ‘다윗과 요나단’을 대표로 꼽습니다. 이 부분을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묵상하고 있는 렘브란트의 시선으로 보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내일(월요일) 사순절 아침 묵상을 통해 그림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 시간엔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결혼 8년만인 1642년, 4명의 자녀 중 3명을 잃고,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마저 잃었던 렘브란트(Rembrandt)는 그 누구보다도 이별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입니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겨우 버텼던 서른여섯, 그 슬픔의 계절에 그는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림은 사울 왕의 질투로 목숨이 위태롭게 된 다윗을 요나단이 아버지 몰래 빼돌려 보내는 이별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떠나 보내는 요나단이 정면을 향하고, 떠나가는 다윗은 등을 보인 채 흐느끼는 듯한 뒷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화가 자신을 요나단의 품에 기대어 흐느끼는 다윗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도 다윗처럼 그 누군가의 품에 안겨 절망을 토하듯이 흐느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우정을 그렸습니다.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현재에 부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을 온전히 안아주고 받아주는 큰 품이 없는 현실에서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화폭 위에 승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안고 보듬어 주는 요나단의 얼굴이 다윗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입니다. 친구로 보인다기 보다는 되려 젊은 아버지에 가깝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어쩌면 36살, 오늘날 나이로 보면 젊지만, 17세기 당시 중년에 가까운 연수를 살면서도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또래의 우정을 만나지 못했던 연유가 아닐까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품을 우정에 기대어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이라고 명명된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땅에서 부재한 사랑, 부재한 우정을 봅니다. 울고 있는 다윗의 뒷 모습을 통해 아내와의 사별을 슬퍼하는 화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이 땅 그 어디에서도 위로다운 위로를 받지 못한 채 하늘에 기대어 우는 렘브란트를 만납니다.




3. 오헵(אהב)과 필로스(φίλος)


구약성경 속에서 ‘친구’라는 표현 중에 무려 200번 이상 사용된 단어가 ‘오헵(הבא)’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깊은 애정을 품은 사람이나 사랑하는 벗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이 말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바로 ‘오헵(אהב)’의 관계입니다.


신약성경 속에서 이 말은 φίλος(필로스)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하실 때 사용된 ‘친구’라는 단어가 바로 φίλος(필로스)입니다.


그런데, ‘친구’란 어떤 사람입니까? … 예수님은 친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에게 있어 친구는 주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명하신 것이란? 9절 - 12절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과 마음을 맞추고, 코드를 맞추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당신의 친구라 하셨습니다. 당신과 더불어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걸어갈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런 친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사랑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13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말도,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통용되고 납득되기 어려운 약속입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 당하고, 친구에게 사기 당하고, 믿고 보증 서주었던 친구로 인해 자신과 가족의 인생이 풍비박산난 사람들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그러니 이분들에게 있어 친구는 때론 잠정적 원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친구마저 잃고 심지어 원수까지 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포숙아를 찾고, 요나단을 만난다는 것은 천에 하나, 혹은 만의 하나마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정한 친구가 없는 세상이기에 역설적이게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이 됩니다.


이를 잘 아시는 주님은 슬픔에 잠긴 다윗을 아무런 말없이 안아주는 요나단처럼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분의 품 안에선 이 땅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위로를 느낍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기대치 못했던 격려를 받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로 슬픔과 비통의 자리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친히 길벗이 되어 그 길을 함께 걸어 가십니다.




4.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이니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되뇌이다 보니, 요나단과는 반대 길에 서 있던 한 사람의 이름이 생각납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도 무책임함으로 발끈하던 가인입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하나님의 물음에 가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


그런데,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가인과는 사뭇 다른 대답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버락 오바마, 그가 거의 무명​에 가깝던 시절,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의 지명을 위한 찬조연설을 할 때였습니다. 그는 그 대답을 이렇게 풀어갔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저에게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제가 이 연단에 서 있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는 케냐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으로 유학을 온 외국 학생입니다. 그는 염소를 치며 성장했고 양철 지붕으로 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의 아버지, 저의 할아버지는 노예였습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 이어 그는 일반 미국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제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제 삶마저 가난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제 시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군중들은 이 연설에 숨을 죽였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자비와 희망의 불씨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까지 했습니다. 그 순간 오바마는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내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인적인 꿈을 추구하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입니다.”

오바마가 말한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라는 구절은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답한 가인의 뻔뻔한 되물음을 대신한 오바마의 답변이었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라는 오바마의 대답은 아들을 죽인 범죄자로 누명을 쓰고 1762년 처형된 장 칼라스(Jean Calas)의 슬픈 누명을 벗겨준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위그노라는 이유 때문에 카톨릭 집단에 매도되어 사형당한 장 칼라스의 무죄를 믿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사람들과 연대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볼테르를 비롯한 사람들의 수고로 재심 끝에 장 칼라스의 아들은 자살한 것으로 판정이 번복되었습니다. 칼라스도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었습니다. 그가 카톨릭 교도들의 종교적 광기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된지 3년 만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볼테르가 쓴 변호문이 바로 ‘관용론'입니다. <관용론>을 통해 볼테르는 좁게는 광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배척에 대해서 비판하지만, 넓게는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고도 슬픈 것은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한 사람을 죽이고, 그 가족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던 인간의 야만과 종교적 광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삼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적 불관용은 인간의 광기에 정당성 마저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요 15:13)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2가지를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우리의 형제는, 친구는 누구인가?

둘째, 우리는 ‘우리 친구를, 우리 형제를, 우리 자매를’ 지키는 자인가?


2천년 전 그리스도 예수님도 인간의 집단적 광기와 종교적 불관용 속에서 처참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친구 만이 아니라, 포악한 광기를 머금고 십자가에 당신을 못박던 사람들까지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는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주님의 친구가 어디까지였는지, 주님이 누구까지 안으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관용과 포용을 기억하며 따라 걷는 사순절 다섯째 주일, 주님의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는 하나님의 질문은 가인을 향한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되받아 질문하던 우리를 향한 물음이었습니다.


오늘도 부재한 사랑, 찾을 수 없는 우정에 목말라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받은 사랑에 1도 되갚지 못하는 미숙한 관중으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서도 위로와 안식을 얻지 못한 채 흐느끼던 다윗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친구가 되셔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아버지가 되셔 우리를 안으셨습니다.


인간의 집단적 광기와 종교적 불관용이 만연한 이 땅에서 이제 우리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빌 4:5)는 주님의 말씀에 살아내는 주님의 친구 되게 하옵소서. 그것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사순절 다섯째 주간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사는 사회, 이 시대가 친구되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닮아가는 관용의 공동체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지난 주간 갑작스런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분들이 우리와 다른 도에 사는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요, 우리가 지켜야 할 형제요, 자매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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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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