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3.31 움오름 주일 설교 - "보편적인 하나님"(출 20:2)

2019년 4월 5일 업데이트됨






출애굽기 20:2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설교문


‘몸의 중심’ -정세훈-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 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누구에게나 중심이 되는 곳은 가장 높은 곳, 가장 영향력이 큰 곳, 가장 조명을 받는 곳, 역할이 큰 곳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몸의 중심’은 사람들의 생각에 역전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곳은 심장도, 뇌도, 폐도 아니라 다름 아닌 가장 아픈 곳, 가장 연약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고단했던 삶이 응축시켜 드러낸 '중심과 주변의 역설'이라는 열매는 깊은 울림으로 사람들을 향해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몸 중심 역설'의 가치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에서도 동일합니다. 중심과 주변의 역설은 십자가 속에서도, 보편성의 성격속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복음의 공공성'이라는 김건주교수의 책을 내용으로 하나님의 보편성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보편’의 사전적 의미는 두루 널리 미침, 모든 것에 공통되거나 들어맞음입니다.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리일 수 없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보편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부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며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일부분만의 하나님이시라면 전능하신 분, 보편적인 분이 아니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도 ‘모두를 포함하는 보편’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나타내는 4가지 표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교회는 ‘보편적 교회’라는 것입니다. 주후 381년에 확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는 교회를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 교회’, ‘사도적 교회’로 정의하였습니다.


여기서 ‘보편적 교회’라는 것은 인종, 지역, 신분, 학력, 재산, 나이 등과 상관없이 교회는 차별이 없는 만민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은 특정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만민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교회 또한 차별없이 만민을 위한 보편적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만민을 위한 차별 없는 교회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전혀 이질감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개념이지만 철저한 계급.신분 사회였던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주인과 노예가, 귀족과 천민이 차별 없이 한데 어우러져 보편적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당시에 보편적 교회를 이룬 한 교회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의 1절은 안디옥교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 13:1)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 즉 안디옥교회 지도자그룹 5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인물은 바나바입니다. 그는 유력 가문 출신의 레위인, 즉 정통파 유대인입니다. 두 번째 인물은 니게르라는 시므온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성경에 없지만 ‘니게르’는 라틴어로 ‘검다’는 뜻입니다. 그는 흑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 흑인은 거의 노예였습니다. 니게르는 비천한 노예출신이었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구레네 사람 루기오인데, 구레네는 오늘날의 리비아입니다. 그도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인물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젖동생이란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친형제를 칭하기도 하지만, 어릴 적 단짝 죽마고우를 뜻하기도 합니다. 마나엔 역시 당시의 불의한 지배계층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 지도자의 마지막 인물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짓밟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초대교회의 대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속으로 7' 중)


안디옥교회는 당시 로마사회에서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가 된 보편적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안디옥 교회의 차별 없는 보편성을 묘사하는 진술들은 참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롭게만 여기고 지나간다면 우리는 중요한 지점을 우리는 놓치게 되고 맙니다. 안디옥교회의 아름다운 보편성을 보면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었다. 아름다웠다. 우리도 이루자!’가 아니라, 그렇게도 심각한 구성원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었는가, 그들 속에서 작동했던 그리스도의 보편성의 모습은 어떤 색깔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이 5명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어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여전히 이전에 가지고 있던 계급적 사고와 가치관, 삶의 논리와 태도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과연 안디옥교회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지도자로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 교회구성원들이 그들의 지위와 부와 권력, 단지 어떤 외형적인 매력이 주는 영향력에 주눅 들어 지도자로 받아주었다 할지라도, 만약 그러한 이유였다면 그런 교회가 모본으로 지속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다섯 명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이 말은, 즉 그들이 지도자로 받아들여진 더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이 자신들의 가치관 그리고 삶을 이끌었던 논리와 실제적인 태도를 포기하였다는 데에 있는 것이며, 그랬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부터는 안디옥교회가 단지 ‘보편교회를 이루어 하나가 되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포기한 것, 그들이 단절한 가치관과 논리 그리고 태도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포기하였는가, 그들에게서 무엇이 단절되었는가를 말입니다. 그리고 또 물어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편성>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그 속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있기에 그들이 그 보편성을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것을 포기하였을 때 공동체로부터 환호와 인정을 받게 되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모두에게 차별 없다는 ‘구원의 보편성’에만 집중한다면 교회는 부자든, 권력자든, 가난한 이든, 무력한 이든 약자든 강자든 각자에게 요청되는 필요의 분량에 상관없이 모든 것에 있어서 똑같은 것들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혀질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는 기계적 평등, 기계적 균등이 곧 보편성이라는 생각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고, 만약 불행하게도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곧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이 뜻하는 것처럼 또 다른 불평등과 갈등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차별 없는 보편성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보편성이 작동되고 적용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을 살피지 않고 단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또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자, 이런 진술있습니다.

“그들은 살아온 사회적 배경이 달랐고, 사상이 달랐고, 삶의 방식이 달랐고, 사고방식이 달랐으며, 지적수준이 달랐다. 그렇다면 그들 간에 문화적, 사회적, 이념적, 교육적 차이로 인해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차이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보편적 교회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 자신들에게 차별 없는 보편적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만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그들을 차별 없이 구원해주신 주님 안에서, 주님에 의해 가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준과 형편과 처지가 서로 다른 인간들끼리만 있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보편적 교회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차별 없는 보편적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는, 누구든지 보편적 교회를 이룰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진술에는 ‘차별이 없는 보편성’이 사람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가 빠져있기 때문에 단지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과연 안디옥교회가 부자든 가난한자든, 권력자든 약자든 어느 누구도 차별 없는 보편적 교회였기에 구성원들이 그를 지도자로 뽑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도자로 뽑힌 것은 차별 없는 보편성 때문이 아니라 더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교회의 보편성 속으로 들어와서 자신들을 그동안 지탱해 왔던 삶의 논리와 가치관과 태도를 포기하였기 때문이었고 그렇게해서 공동체 구성원들로 부터 지도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한 포기의 바탕위에서 <보편성의 차별 없음>은 비로소 후유증 없는 참된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차별 없는 만민을 위한 보편적인 구원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살인자가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살인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독재자일 수 있는가. 강도일 수 있는가. 착취자요 인종차별자요 악덕기업주일 수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세상에서 부와 권력과 영향력이 있다는 이들이 교회안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지도자로 선망된다면 그 교회는 겉으로는 거룩과 겸손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야말로 값싼은혜의 상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실상 오늘날 교회 안에서 높은 지위와 지식능력과 부와 영향력을 가졌다느 이유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지도자로 선택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당연히 차별없이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이유만이라면 교회는 세상속에서 점점 맛과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내려놓지 않고 단지 예수 믿는 다는 이유하나만이 원인이 되었다고 여긴다면 정확한 시각을 상실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보편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부단하게 하나님의 가치관아래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의 논리와 삶의 태도를 내려놓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단지 ‘예수천당 불신지옥’ 할 것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어떤 색깔과 특징을 가졌는지, 우리들의 것과는 무엇이 왜 다른지를 치열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휘발시켜 버리고 단지 너그러운 마음을 품고,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모든 것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화사하게 지내라는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20장 2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시내광야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자신을 이스라엘백성을 종살이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모세가 부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나는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무것에도 한정되거나 제한되지 않는 분임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한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그분의 존재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 받던 이스라엘백성들을 건져내신 후에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아무것에도 한정될 수 없는 당신 이름을 스스로 한정하십니다.

  •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이렇게 모두를 담지 못하고 무엇 무엇으로 한정하는 순간 그 한정된 것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보편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자신을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으로 한정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당신 자신을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특정된 존재만이 아니라 모두의 하나님 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노예들의 하나님이라고 특정한 무리를 한정하시면 편파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편성에 위배되어 보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기분을 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한정의 말씀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 그 환경과 상황 속에서 적용될 때 비로소 그 말씀의 진의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환경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다수,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중요한 것들을 결정하고 선택 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모두를 위한다는 좋은 일을 시행할 때 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그 일은 가능합니다, 이러한 <힘의 논리, 다수의 논리> 때문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힘이 약하고 소수에 속하는 이들은 늘 소외되거나 고통당하기가 쉽습니다. 힘이 있어서 자신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이들에게는 행복한 세상이겠지만 이것은 결코 ‘전체가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전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일까요? ('복음의 공공성'의 내용으로 부터)


하나님의 논리, 예수님의 논리는 이와는 다릅니다. 방향자체를 달리합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광야에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온 광야를 찾아다니십니다. 최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의 논리와 확연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전체의 하나님, 모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고 히브리 노예의 하나님이라고 당신 자신을 편파적으로 한정하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곧 <진정으로 전체를 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결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이 질문에 역설적으로 대답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진정으로 전체를 위하는 것은 소수보다는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전체를 위하는 것은 가장 약한 존재인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낼 때 달성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전체가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인이 전체 중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나머지 양들도 자기들이 길을 잃거나 낙오하더라도 주인이 자기들 역시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와 신뢰는 모든 양들로 하여금 정말로 안심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논리를 내려놓고 새로운 논리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아니 새로운 논리에 눈을 뜰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논리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우리의 공동체가 그 속에서 가장 약한 자들, 가장 소외된 이들, 희생자들, 취약한 상황에 놓인 자들을 지켜내고 살려낼 때 비로소 전체가 살게 된다는 예수님의 논리를 말합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 자신 또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장애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어린이와 소외된 이들, 힘없는 이들에 대해 관심가지고 애써야 하는 타협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사람에게는 어떠한 것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가 윤리적인 사람인지, 그가 과연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디출신이며 어떤 가정형편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가 사마리아인의 그 전적인 헌신의 도움을 받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가 강도를 만났다는 그 사실, 그가 고통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신학자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Jose Miguez Bonino)는 하나님을 'God, who takes side'라고 표현합니다. 즉 '편드는 하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불편부당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편을 드십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보호자를 자처하시고,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도우십니다.


참 놀랍습니다. 가장 곤고하고 약한 이를 지켜낼 때 그것이 곧 전체를 지켜내는 보편적 행동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인 말씀인 성경은 끊임없이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가난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늘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보호자로 자처하십니다.

  • 그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시다(시68:5)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미미한 자들을 아예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적 예전 속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은 진정한 예수가 아니라 어쩌면 인간의 종교성이 만들어 낸 허상일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생각 할 때 전혀 예수님을 떠 올릴 수 없는 존재, 이 땅에서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의 모습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 시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25:35)

  •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25:36)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로 한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편파성을 나타내는 듯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편파성’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보편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건지시는 하나님이 되실 때에 진정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다. “약자 중심이면 절대 편파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전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라고 김근주 교수는 말합니다.


차별 없는 보편성은 기계적 균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보편성은 오히려 약자에 대한 편파성을 자신의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약자를 향하여 기울어지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 할 수 있고, ‘정의’라고 할 수 있고 때로는 ‘분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는 보편성의 또 다른 얼굴을 가진 쌍둥이 형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특별히 한국교회가 그 보편성을 얼마나 잔인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거룩과 보편을 혐오와 배제의 방식으로 주장합니다. 보편진리를 담지 했다고 생각한 교회는 천상의 심판자가 되어 사회적 고통 앞에서 냉정하고 중립적이고 차별 없는 언어만을 구사합니다. 사회가 정의를 외칠 때 교회는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수 백 명 학생들이 설명될 수 없는 죽음의 참사로 희생되어 세상이 고통과 탄식으로 공명할 때 교회는 그들을 향해 ‘죽음이라는 보편’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슬픔에 휩쓸리는 ‘획일화의 우상’에 욕을 먹더라도 용감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차별과 혐오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할 때 교회는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지키는 영적 분별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 다양하게 공존해야 하는 것들을 진리와 비 진리, 흑과 백으로 나누고 구분 짓습니다. 역사 속에서 진리와 보편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교회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또 광범위한지 모릅니다.


교회는 지금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정작 사순절은 이 땅의 교회를 향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난’에 대한 교회의 칭송과 집중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고 어떤 장소를 향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사순절은 진정한 진리의 보편성이라는 확성기를 통하여 무겁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지강유철 선생은 자신의 사순절 음악 산책을 통해 바른 영성에 관한 화두를 이렇게 던지고 있습니다. "수난 음악에서 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균형은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에 집중한 나머지 오늘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과 구원의 문제에 눈을 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골고다로 가시면서 한없는 연민과 슬픔으로 자기 뒤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후손을 위해 울라고 하셨지요. 때문에 예수 이외의 풍경을 모두 아웃 포커싱 처리하는 교회 음악은 거룩한 게 아닙니다. 한 눈을 감은 것이 거룩한 영성일 리 없지 않겠습니까." (사순절 음악 산책 ③ 아르보 패르트, ‘스타바트 마테르’ 중)


보편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회 속에서 교회는 어떤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고, 또 어떤 논리를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현해 가야 할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세상이 추구하는 힘의 논리, 다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은 아니어야 할 것임은 자명합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예수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논리와 태도로 자신에게 지워진 삶을 감당했는지 그 예수의 논리, 가치관, 태도에 설득되어 기꺼이 자신의 논리, 가치관, 태도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빈부와 남녀노소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격차를 넘어서서 공동체 안에서 참된 보편의 가치를 리더로서 구현해 갈 수 있었습니다. 곧 진정한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회 속의 시민으로, 국가의 부름 받은 섬기는 이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진정한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우리 자신의 가치관과 논리와 태도를 되돌아보며 다시 보편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성찰해 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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