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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19.03.24 움오름 주일 설교 - "내 안에 거하라"(요 15:4-11)

최종 수정일: 2019년 3월 28일





 

요한복음 15:4-11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문


1. 중요한 것은 '근원'


인간은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을 통해 성장해 가고, 성숙해 갑니다.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이란? 봄을 지나 여름이 되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고, 겨울에 이르듯이 태어남과 자람과 나이 듦,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며 생을 사는 동안 기계적으로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각 단계를 살아가는 이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삶이란게 어려움이 많고, 변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최상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원치않는 운명같은 유산을 부모로부터 받아 힘들고 어려운 성장기를 보냅니다. 그렇다면, 좋은 환경을 물려받은 사람의 인생은 빛나고, 그렇지 못한 환경을 받은 사람은 암울하게 마무리 될까요?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볼 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렇다면, ‘삶이 우리를 속이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삶을 어떻게 하면 보다 완성도 있는 삶으로 가꾸어 갈 수 있을까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쁘고, 꿈꿔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고 하는 희비극이 교차하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하면 ‘눈이 부시게’ 마무리해 갈 수 있을까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처럼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며, 슬픈 날에도 참고 견디면’ 그렇게 될까요? … 모두가 인식하듯이 삶은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스트레스가 각종 병을 유발하는 현 시대 속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 문제의 원인을 해결받아 보다 건강한 점진적 발전을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1962년 제작되어, 1998년 재상연되기도 했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는 T. E. 로렌스 (Thomas Edward Lawrence)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처칠이 가장 신뢰했던 아랍문제의 고문이기도 했던 그는 터키군으로부터 수에즈운하를 지킬 뿐 아니라, 아랍민족연합회의를 결성하려던 꿈을 꾸었던 고고학자요, 군인이요, 저술가였습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처칠의 아랍 문제 고문으로서 그가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회의에 초대된 아랍 지도자들이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호텔 욕실의 수도꼭지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물을 보았습니다. 굉장한 감명을 받은 그들은 그 수도꼭지만 있으면 사막의 그 어디에서든 생수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의 마지막 날 수도꼭지를 떼고 있었다고 합니다.

로렌스가 전하는 아랍 지도자들의 ‘수도꼭지 이야기’가 우리로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런데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와 같은 류의 사고를 할 때가 많습니다. 아랍 지도자들이 물의 근원과 연결되었는지 상관없이 수도꼭지만 있으면 수돗물이 계속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우리도 생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의 연결유무와 상관없이 내가 생각하는 ‘수도꼭지’만 추구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문제 속의 답을 사람을 만드시고, 인생을 설계하신 생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수도꼭지가 아닌 ‘근원’에 연결되는 일체의 비결이 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끗하게 한다’는 ‘가지치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동사 ‘거하다’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 15장 4절 – 11절 중에 ‘거하다’라는 동사는 여러 번 등장합니다. 모두 ○표 해보시겠습니다.

4절(2번), 5절(1번), 6절(1번), 7절(2번), 9절(1번), 10절(2번). 모두 몇 번입니까? 무려 9번입니다. 주님은 짧은 본문 속에 “거하라”는 동사를 9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만큼 이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거하는 것이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의 비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은 가지 혼자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듯,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을 거치며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우리 혼자서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바로 거함의 문제(연결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한다’는 것을 나무와 가지의 입장에서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포도나무 본체가 있습니다. 그 본체에는 한 가지, 한 가지들이 붙어있습니다. 본체인 나무는 어두운 땅속 구석구석에 뿌리를 뻗어 농부가 준 영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그리고 가지들을 위해 수액 속에 영양분을 담아 공급합니다. 자라는 열매를 위해 아낌없이 보냅니다. 이때 나무와 열매 사이에서 영양분이 흘러들어가는 중간역할을 하는 것이 가지입니다.

고로 나무와 닿아있는 가지가 어떤 상태, 얼마나 건강하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집니다. 가지가 얼마나 나무에 견실히 붙어있느냐, 본체에 어떻게 거하느냐에 따라 열매의 양과 질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가지가 나무에 어떻게 거하느냐’는 것은 과실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거하지 못할 때의 결과


그렇다면,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할 때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요 15:6을 통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그 결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가지의 목적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을 때, 즉 나무를 버리고 독립된 자아로 맘대로 살아가려할 때 가지는 자신의 존재목적과는 전혀 다른 땔감으로 사용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 이른바 제자라고 하던 사람들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주님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을 거부할 때, 본래 존재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는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지난주일에 본문말씀을 다루며 들었던 2가지의 질문 중 하나를 이번주일에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건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제자들이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을 때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밤이 지나기 전에 하나같이 주님을 배반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들이 깨끗하다고 현재시제로 말씀하신 걸까요? 어떤 신학자들은 이를 ‘칭의’와 ‘성화’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칭의는 신분의 변화이고, 성화는 신분에 맞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3절을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굳이 분리할 필요없이,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 깨끗함(가지치기)을 유지하고 강화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고 성숙해 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제자들이 그 깨끗해진 것을 인지했든, 인지하지 못했든 주님의 말씀이 이미 그들 속에서 깨끗함을 확보했다는 선언적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번 깨끗해 졌다고 해서 다시 말해 단회적인 주님 안에 거함이 마지막 까지의 결과를 담부하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인 거함이 수반되어야 함은 변함없는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본문 속에서 무려 9번이나 ‘거하라’는 말씀을 반복,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3. 거하는 것이란?


그렇다면,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성 프란시스코가 전해주는 한 일화가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메고 가는 것을 성 프랜시스코가 보았습니다. 가득 채운 물통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려 물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얼른 물통에 나무토막 하나를 넣고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 프란시스코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물통이 무거울 텐데 거기다 나무토막까지 넣었는가?”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흔들리는 물통에 나무토막을 넣으면 물이 쏟아지거나 넘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출렁이는 물이 파고를 높이며 물통에 부딪혀 넘치기 전 중간에 떠 있는 나무에 부딪혀 잦아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성 프랜시스코는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합니다.


마음이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나무십자가가 떠 있으면 생의 파고가 잦아듭니다. 문제가 문제로 남지 않습니다.


그룹 들국화가 부른 ‘사노라면’이라는 노래를 웬만한 어른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 노래의 가사를 차용하자면, 사노라면 밝은 날도 흐린 날도 있습니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잘 때도 있습니다. 물질과 건강과 사람 등 여러 모양의 비바람이 몰아쳐 오는 때입니다.


그럴 때 심령 속에 주님의 나무 십자가를 넣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삶,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말씀 하시고, 내 삶이 그에 반응하는 삶, 바로 그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점진적으로 자라가고 열매 맺는 삶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애쓴다기 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해 가시는 것의 결과입니다.




4. 거할 때의 유익


또한 주님은 당신 안에 온전히 거할 때의 유익에 대해 2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유익은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 첫째 유익 첫째 유익은 어떤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다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이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포도나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를 달고 있는 가지가 붙어있습니다. 이때 가지가 나무에게 구할 수 있는 것, 아니 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매를 위한 모든 양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 붙어 있는 사람이 구해야 할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당연히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키우는 열매가 최상품이 되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허황된 욕망이 아니라,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생명의 열매를 위해 구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명의 열매를 위해, 진리의 열매를 위해 무엇이든지 구하는데,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말씀을 오용해 왔습니까! 얼마나 내 욕망의 성취를 위한 근거로 삼았습니까! 주님이 하셨던 말씀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주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의 유익은 풍성한 열매맺는 삶입니다. 그 풍성한 열매는 주님의 성품, 주님이 드러나는 생명의 열매, 진리의 열매입니다.


2) 둘째 유익 가지가 나무에 온전히 거할 때의 두 번째 유익은 8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안타깝게도 이 말씀은 원문의 어순을 뒤바꿈으로써 본래의 뜻을 충실히 살리지 못했습니다. 원문대로 순서대로 정확히 번역해 보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나의 제자인 것이 입증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한글 번역상으로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도 된다는 두 개의 결과가 생기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상의 의미는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고,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이 두 가지가 충족이 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2가지를 정리해 생각해 봅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류의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많이 맺고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 제자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진정한 제자로서의 삶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5. 사랑하며 거하는 것


주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되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사람들은 교회 일을 많이 하는 것, 전도 많이 하는 등의 행위, 즉 ‘Doing’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이런 말씀 앞에 서면 찔립니다. 정말 봉사 열심히 하시면서도 미안해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의 형태는 될 수 있을지언정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Being’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거하면 나무의 속성을 꼭 닮은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가지가 포도나무에 거하면 포도를 맺습니다. 사과가지가 사과나무에 거하면 사과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된 사람들이 주님께 거하면 무엇을 맺을까요? 주님을 맺습니다. 우리의 하는 일 속에 주님이 맺힙니다. 우리의 말 속에 주님이 맺힙니다.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주님을 꼭 닮은 열매(결과)를 맺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10절과 12절을 통해 당신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면서 아버지의 속성인 ‘사랑’의 열매를 맺듯이, 제자된 우리 역시 주님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 역시 주님 닮은 사랑, 주님 닮은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Better than Good」이라는 책을 쓴 지그 지글러는 그의 책 마지막 16장 <최고의 삶은 사랑하는 삶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당부한다. 당신의 어린 딸들을 사랑하라. 특히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정

체성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 더욱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라.”

이 세상의 부모치고 사랑으로 자녀를 대하지 않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녹녹치 않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사랑하고 싶어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릅니다. 어색합니다. 속에서부터 열불이 먼저 나오고 고성이 먼저 뛰어오릅니다.

그러나 그때 친절하고,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사려깊고, 자애롭고, 이해심 많고, 인내심 많은 아버지를 둔 사람치고 어른이 되어 신체적,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반면, 그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은 남녀불문하고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건조하며 때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에 친절, 상냥, 사랑, 사려, 자애, 이해심, 인내심 많은 이런 아버지가 흔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보다 앞서 우리가 겪은 우리의 아버지는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친절하고, 사랑 많고, 인내심 많은 그런 아버지를 만나보지도, 그런 아버지이지도 못한 우리에겐 소망이 없단 말입니까?

지그 지글러는 정신의학자 로스 캠벨박사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상에서 아버지의 사랑의 부재는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언제든지 극복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어린 시절에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관계가 깨어진 사회, 그래서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계약이, 조건이 난무하고, 질책과 원망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거리를 살고 있습니다. 이 메마른 거리를 누구의 손을 잡고 걷고 계십니까? 누구 안에 거하십니까? 주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의 사랑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당신 사랑 안에 거하라하십니다. 그때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근원적이고 본질적 기쁨이 부서지고 조각난 세상 속으로 흘러가고 넘쳐가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가슴에 담은 가지, 그래서 그분을 꼭 닮은 가지, 그 가지를 바라며 말씀하십니다.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4절)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순절 셋째 주일 우리 속에 거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 거함으로 주님 마음 담고, 주님 닮아 가는 제자되길 원합니다. 하는 일 속에, 하는 말 속에 주님이 담겨져 주님 닮은 삶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그리스도인 되길 원합니다.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을 통해 성장해 가고, 성숙해 가는 인간의 삶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수많은 변수들이 위협하는 우리 삶입니다.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주님 나무 십자가 가슴에 담고 주님으로 겪어가고 이겨가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은혜로 결핍의 환경을 넘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나누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9.03.24 봉헌기도 - 윤성천

우리 존재와 삶의 근원이고 본질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한 주님께서 이제 우리 안에 계시건만, 우리의 일상은 주님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들과의 사이에서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마음이 불안정하여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세상에서의 성취에 주님의 도움을 구하다 보니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열매는 주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생명의 열매, 진리의 열매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말 속에 그리고 하는 일들 속에 주님이 나타날 만한 결과를 맺음으로써 주님이 영광받기를 소망합니다.


내안에 있는 이기심과 끊임없이 유혹하는 사탄 마귀의 흉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는 교회로 바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하오니 그렇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구별하여 올립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값지게 쓰임받는 예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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