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3.10 움오름 주일 설교 - "제거해 버리시고"(요 15:1-2)

2019년 3월 1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5:1-2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설교문


1. 배신하지 않은 교회

요한계시록을 보통 종말에 관한 예언서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종말의 때에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서있어야 할지에 대한 성령님의 지침 또는 당부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가 계시록의 첫 부분(계 2장 - 3장)을 할애하여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 2장 - 3장의 일곱 교회들을 분류해 보면, 모두 3가지의 그룹으로 나눠집니다. 첫째 그룹은 칭찬 + 책망을 들은 세 교회입니다.

둘째 그룹은 칭찬은 한 마디도 없이 책망만 들은 두 교회입니다.

셋째 그룹은 책망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칭찬만 들은 두 교회,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 둘중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말씀을 잠시 새겨 보겠습니다. 계 3:7-8입니다.

  •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칭찬은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 것입니다.

: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시며,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삶을 살았는지 주목하고 계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2가지 행위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 첫째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겁니다.


사람은 규모와 숫자에 집중하고 주목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춰야 주님의 일도 할 수 있고, 주님도 기뻐하실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보다는 규모와 숫자에 상관없이 그 작은 능력으로도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썼는지 주목하셨다고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러했다는 겁니다.


시편기자는 119:97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했는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종일 작은 소리로 주님의 말씀을 읊조리던 그는 마침내 그 결과를 이렇게 진술합니다. 시 119:109입니다.

  •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생의 위기에 처했으나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음을, 그 말씀을 지켰음을 의미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초기 모진 박해와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의 말씀, 그 법을 따라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칭찬하신 첫째 이유입니다.


둘째,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은 것입니다.

: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을 뿐 아니라, 주님을 배반치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핍박 앞에서도 유혹 앞에서도 당당히 주님을 고백하며 신실한 교회로 서 있었습니다.


핍박의 시대에 주님을 향한 배반을 유도한 것이 외부적인 폭력과 억압이었던 건에 비해 평화의 시대엔 풍요와 쾌락은 배반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바쁜 내 일정과 즐거움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채 주님은 뒷전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안 바쁘면, 평안해 지면 그때 예배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작은 능력의 상태에서도 주님을 배반치 않았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이야기 하시며 본심을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작은 능력, 현재의 그 상황과 상태에서 나를 사랑하면 안 되겠니?”


작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빌라델비아 교회.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을 들으며 오늘 창립 4주년을 맞이하는 움오름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두 교회는 모두 작은 능력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능력으르도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지켰는지, 그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는지,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예배했는지 오늘 되돌아 봅니다. 주님 앞에 이런 교회로 서 가길 소망하며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2. 하나님의 배신?

주님을 배신하지 않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도 ‘배신’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새삼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앞에서 불경스럽게도 ‘하나님의 배신’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2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시겠습니다.

  •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


방금 이 말씀을 읽으셨는데, 뭐 이상한 것이 없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저는 아무렇지도 않는 여러분들을 보니, 제가 더 당혹스럽니다. 왜 그럴까요? … 저는 애초 이 말씀이 이해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매우 당혹했습니다.


열매없는 가지를 제거해 버리는 농부가 이해가 됩니까?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농부는 자신의 생명을 다해 농작물을 가꿉니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해 포도나무를 돌봅니다. 그런 농부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를 단번에 싹 잘라버릴 수 있습니까?


안전판이 되시며, 되돌아갈 집이 되시며, 책임져 주신다면서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변증하려 합니다. ‘아! 그것은 가지에 붙어있지 않기에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지는 당시 유대인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 제자들이나 우리들을 향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억지로 하나님을 변증하려는 ‘믿음의 시도’가 되려 거슬립니다. 애둘러 이런 말로 피해가려는 것이 불편합니다. 딤전 2:4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며 진리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바램 안에 유대인은,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딤전 2:4은 거짓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2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열매맺지 못해서 농부에게 제거된다고 하는 가지는 포도나무되시는 예수님께 분명히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농부의 처사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요 15장 4절 - 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께서도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며 당신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이 가지는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며, 누구의 책임입니까? 이 가지는 서툰 변증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유대인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주님께 붙어있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포도나무되신다는 주님은 당신에게 붙어 있기만 하면, 분명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며 당신이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포도나무의 책임이며, 농부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농부는 그 포도나무는 가만히 두고 힘없는 가지를 쳐버릴 수 있습니까? 이런 농부가 과연 나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책임져 주는 농부라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런 농부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과연 멀리멀리 나아가는 아이처럼 자유함을 갖고 뛰어갈 수 있겠습니까? 돌아갈 집이 있는 여행자처럼 평안함을 갖고 순례의 길을 과연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진정 하나님이 이런 농부, 이런 하나님이시다면 비록 불경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배신’아닙니까?



3. αἴρω(아이로)의 새로운 해석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읽고, 듣고, 지나갔던 요 15장의 말씀은 초반부터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배신일까요? … 저는 한때 이 문제로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요 15장 2절의 헬라어 원문을 사전을 가지고 살펴보던 중 ‘제거하다’로 번역된 αρω(아이로)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개역개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한글성경과 영어성경들도 ‘아이로’를 ‘제거하다’로 의심없이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로’는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면 제 1뜻과 2뜻은 ‘들어 올려주다’, ‘지다’라는 영단어 lift up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과 영어성경에 번역된 ‘제거하다’라는 ‘remove, cut off’의 뜻은 3번째 뜻입니다.


일례로 ‘아이로’가 다른 성경에 쓰여진 곳을 통해 용법을 잠시 살펴보시겠습니다. 마 1장 24절 말씀입니다.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십자가를 지고’라고 할 때의 ‘지다’, 즉 ‘들어 올리다’라는 단어가 ‘아이로’입니다. 요 5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걸어가라”라고 하셨을 때, ‘들고’라는 단어 또한 ‘아이로’입니다.


이렇게 신약성경 속에서 아이로는 대부분 ‘들어올리다’, ‘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말 성경 요 15:2에서는 ‘제거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로’라는 단어를 ‘제거하다’가 아닌, ‘들어 올리다’(lift up)으로 바꾸어서 요 15장 2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들어 올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일단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지 않는 것은 1절과 상치된 의미에서 좀 벗어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들어 올리다’라는 새로운 해석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저는 이 부분을 2008년 터키의 동부지역을 순례하다 깨달았습니다. 터키의 동부지역의 기후는 거의 이스라엘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기후와 토양이 박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산길을 올라가는 동안 오른쪽 차창 밖으로 보이는 포도밭 풍경이 참 신기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보았던 여타 포도밭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포도밭은 군데군데 콘크리트 또는 나무 등으로 지주를 어른 키 높이 정도로 세운 뒤 줄로 팽팽하게 연결합니다. 그리고 포도 넝쿨이 그 줄을 타고 뻗어나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터키에서 보았던 포도밭의 포도는 거의 땅바닥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에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물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물을 채우기 위해 포도나무는 최대한 땅바닥에 붙어서 심한 일교차로 인해 맺히는 이슬을 받아 자라도록 낮게 키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넝쿨의 형태를 지닌 포도나무의 가지가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땅바닥에 붙어서 자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포도나무가 땅바닥에 붙어 자라면 한 가지 좋지 않은 현상이 일어닙니다. 그것은 포도나무 가지에서 새로운 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참고로 포도나무의 증식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꺾꽂이 이고, 다른 하나는 휘뭍이 입니다. 꺾꽂이는 말 그대로 포도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심어놓으면 뿌리가 나서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휘뭍이는 가지를 자르지 않은 채 가지의 중간을 흙에 묻어두면 그곳에서 뿌리가 나오는데, 그때 잘라서 옮겨심는 방법입니다.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갑니다. 땅에 닿은 포도가지에서 새뿌리가 나온다는 것은 휘묻이 효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통해 가지는 포도나무로부터 영양분을 받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연약한 뿌리에 의지해서 살려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열매는커녕 스스로의 생존자체가 불투명해 지게 됩니다.


이때 농부는 이러한 가지를 잘라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돌을 주워 와서는 그 가지 아래에 놓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뿌리를 제거한 뒤 그 가지를 가져온 돌 위에 들어올립니다. ‘아이로’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가지는 나무로부터의 원활한 영양분을 공급받음으로써 활기를 띄게 되고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를 갖춰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제거해 버리시는’, 아니 αρω(아이로)하시는 농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4. αἴρω(아이로)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열매없이 한 해, 두 해를 그냥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어중간한 뿌리를 내리고 제 힘만으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입니다. 그때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그런데 이러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제거해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이것은 복음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생각입니다(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사셔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당신의 아들을 내어 십자가에서 찢어 대속케 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래도 살아보겠노라고 당신의 아들에게 붙어있는 가지를 한 해, 두 해 열매맺지 못했다고 제거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온 생명을 던져 붙들고 있는 가지인데 그렇게 잘라버리시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오히려 그 농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작열하는 땡볕 아래에서 허리를 굽혀 돌을 주워옮기십니다. 그리고 연약한 뿌리에 의지해 있는 가지를 들어 올리십니다.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자기 의로 살 수 있다고 발버둥 치는 자녀들을 들어 올리십니다. 그리고 돌로 받쳐주십니다. 농부되시는 우리 아버지는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 올리시는 그 일에는 내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우리 고집과 교만의 뿌리가 뜯겨져 나가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이로’하시는 농부 아버지의 사랑은 다른 말로 ‘훈계’이며, ‘징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변명할 수 있습니다. “포도가지의 속성은 본래 넝쿨입니다. 홀로 지탱할 힘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땅바닥에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비가 많지 않는 이런 척박한 땅에서 이슬을 먹고 살아내려면 땅바닥에 붙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삶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농부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메마르게 방치해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삶이 말라가는 크리스천으로 전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잔뿌리를 뜯으면서까지 ‘아이로’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5. αἴρω(아이로)하는 교회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이자, 움오름교회 창립4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뜻깊은 날에 우리는 열매없던 우리를 제거하시지 않고, 되려 들어 올리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αρω(아이로)하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지난 4년 동안 제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땅바닥에 붙어 잔뿌리 내리던 우리를 들어 당신의 반석 위에 올리시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같은 작은 size,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움오름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나가야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교회로 존재해 갈 수 있을까요?


조작과 미화의 논란이 있지만, 오스카 쉰들러가 실제 유대인을 구해내던 과정을 그린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우리 존재의 방식을 생각해 봅니다. 기회주의 사업가 쉰들러가 자신의 공장의 무일푼 근로자로 이용하기 위해 유태인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수백 수천명의 사람이 죽음의 공포속에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그래서 뇌물을 주어 사형선고를 받은 유대인을 한 명, 또 한 명씩 더 빼내어 자기 공장에서 일하게 합니다. 그렇게 구한 사람이 모두 1100명입니다.


영화 속에서 마음을 짠하게 하던 장면이 있습니다. 전세가 바뀌어 독일이 패하고 연합국이 승리하자 나치당원 쉰들러가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치 고해성사처럼 이렇게 통곡합니다.

“내가 타고 다니던 저 차를 팔았다면 열 사람은 더 살렸을 텐데… 내가 달고 있던 나치 금배지를 팔았다면 한 사람은 더 살렸을 텐데… 내가 하지 않은 거야”


한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못했음을 비통해하며 통곡하는 장면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쓰고 있는가라는 우리를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 옵니다. 지탱할 힘이 없어서 땅바닥에 붙어있는 포도나무 가지같은 사람들을 들어 올리는 αρω(아이로)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창립4주년을 맞아 4번째 디딤씨앗통장 후원아동(보육원)을 선정해서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맘 같아선 이번에 4명, 아니 40명이라도 더 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한편으로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타고 다니던 차’, ‘달고 있던 금배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그럴 형편이 안되어서 안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봅니다.


귀하신 움오름 가족님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우와 열’을 나눕니다. 실적과 성과에 따라 줄을 세웁니다. 그리고 투자대비 효과와 효율이 떨어지면 제거하는 것이 상식이요, 일상인 사회입니다. 주님은 이런 환경 속에서 효율성 떨어지는 우리를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되려 허리를 굽혀 αρω(아이로)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허리를 굽혀 힘을 다해 αρω(아이로)하는 교회로 존재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 4년 동안 작다고, 작은 능력을 지녔다고, 큰 열매가 없다고 우리를 제거해 버리시지 않고, αρω(아이로)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나이 4살이면 자기 맘대로 하겠다고, 자기 힘으로 하겠다고 생때를 부립니다. 행여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그렇지는 않은지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들어올리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αρω(아이로)하시는 주님을 마음에 새깁니다. 바라기는 이런 주님을 우리도 닮아 한명이라도 더, 한명이라도 더 αρω(아이로)해 가는 교회 공동체 되게 하옵소서.


지난 4년 동안 별 것 아닌 교회, 설명해야 하는 생소한 이름의 교회 속에서 함께 이 길을 걸어와 주신 움오름의 가족분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세상의 큰 것이 주는 유익과 안정감 보다는 작은 능력으로 함께 세워가는 것에 의미를 둔 이 걸음을 눈여겨 봐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분들의 자신을 드려 αρω(아이로)한 걸음이 주님 앞에서 별과 같이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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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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