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3.03 움오름 주일 설교 -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2019년 3월 1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5:1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설교문


1. ἐγώ εἰμι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가 되는 것이 “나는 ~이다”라는 뜻의 헬라어 γώ εμι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 자신을 비유적 γώ εμι로 표현하신 것이 모두 7번 나옵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요 6:35)

②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③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

④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

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⑥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그리고 오늘 본문에 있는…

⑦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 15:1)

γώ εμι는 단순히 “나는 ~이다”라는 주어와 술어가 아닙니다. 거기엔 매우 깊은 영적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B.C 3세기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72명의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때 출애굽기 3:14의 “야훼(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γώ εμι로 번역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γώ εμι에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모세에게 “야훼(스스로 있는 자)”라고 설명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세상을 향해 당신이 “야훼”(스스로 있는 자)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6개 γώ εμι와 요 15장의 γώ εμι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γώ εμι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누구이신지를 밝히신 반면, 요 15장의 γώ εμι는 제자들과의 관계성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힌 γώ εμι라는 점입니다. 요 15:1이다.

  •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주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힘에 이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참 포도나무인 주님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지를 밝힌 겁니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비유의 대상 중에 포도나무를 들어 당신을 설명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포도나무를 설명하는 ‘참된’이라는 수식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사회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를 상징하는 식물은 포도나무였습니다. 시 80:8입니다.

  •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430년 만에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을 시편기자 아삽은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성전건축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성전 입구에는 가장 정교한 예술가들의 손으로 만든 금, 은으로 된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 달린 무성한 잎사귀와 큰 포도송이들은 번성하는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대표했습니다.

유대인이 스스로 여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super ultra 캡송 포도나무였습니다. 사 5:2입니다.

  •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의 품종은 극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극상품 포도를 맺는 대신 형편없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배교의 길을 걸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은 상실한 채 율법의 겉만 고수하다 말씀과는 상관없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가짜로 살았던 포도나무 이스라엘의 흑역사를 잘 아시던 주님은 그들과 당신을 배치시켰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가짜와 불완전한 것에서 새롭게 하실 ‘진짜, 순수한, 이상적인’,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2. 농부 하나님

주님은 본래의 정체성대로 살지 못했던, 형편없는 들포도를 맺었던 이스라엘, 다시 말해 인간과는 분명 다른 ‘참포도나무’셨습니다. 육체라는 몸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훌륭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참포도나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비결을 이렇게 비치셨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가꾸고 돌보듯이 하나님께서 주님과 주님의 사역을 돌보시는 농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의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즉, 포도나무는 절대적으로 농부에게 의존적이 되듯이, 예수님 역시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들판에서 자라는 벼가 혼자서 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농부의 손길이 얼마나 자주, 또 많이 가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까지 했겠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을 느끼고 교감하며 참포도나무를 맺어가셨습니다.

저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농촌에서 가장 바쁜 시기인 6월이었습니다. 6월이 가장 바쁜 이유는 보리를 추수하고 모내기를 해야 하는 교차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 농사짓던 모습과 관련해 몇가지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무척이나 가문 어느날이었습니다.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벼들이 타들어 가던 날 밤에 아버지는 냇가 바닥을 파서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드시곤 밤새 양수기로 논에 물을 퍼올리셨습니다.

그러다 태풍과 장마로 폭우라도 쏟아지면 얇은 비옷차림에 삽 한 자루 들고 들로 논으로 뛰어가서 논에 물조절을 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 뿐 아니라, 대부분의 농부가 그러했습니다. 시골교회 저의 친구 아버지도 천둥치고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논으로 달려나다 번개에 맞아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별 의미 없이 사서 먹는 쌀 한 톨에는 이런 농부들의 땀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고, 애환이 서려있습니다.

포도나무를 책임지는 농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포도원을 만들기까지, 그리고 포도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의 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적어도 제대로 된 농부라면 이것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이런 농부시라는 겁니다.



3. 관용과 배려의 안전망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성만찬과 세족식 이후 자리를 옮기면서 까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는 말씀을 하셨는지 그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십자가 처형 하루 전이었습니다. 가룟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며 버림받는 밤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이미 경고하셨던 예수님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비애와 섭섭함이 잠시 떠오르셨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비록 배신하고 도망갈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인간들을 위해 그 길을 가시려 했습니다. 왜요? 농부되신 하나님께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든든한 울타리요, 안전판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8년 전, 교역자 평가제를 준비하라는 오더를 받고 괴로워 할 때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상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관리해 간다는 번듯한 명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당기준에 모자라는 교역자들을 감봉처리하고, 그래도 개선되지 않으면 내보내야 하는 수단이 됨으로써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는 개념은 상실되고 감시자가 되어야 하는 비애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참 힘들어 할 때, 선배가 제게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안전할 때 사람들은 더 멀리 갑니다. 안전할 때 비로소 위험을 감수한 시도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돌아갈 집이 있는 오지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고통이 아니며, 혹 비참함도 아픔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뛰어가다가도 뒤돌아 엄마가 자기를 빙그레 지켜보고 있음을 확인한 뒤 다시 더 멀리 뛰어갑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함은 곧 두려움이요, 멈춤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갈 집이 없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처절한 투쟁이요, 벗어야 할 무거운 짐이요, 수고로움일 뿐입니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사회는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여행자의 발걸음 같습니다. 안전망이 허물어져 처절한 투쟁과 비참한 포기만이 무성하여 아우성과 비명 가득한 어두운 숲입니다. 안전한 사람은 빛이 납니다. 안전한 아이는 얼굴에 광채가 깃듭니다. 안전한 사회는 관용과 배려가 깃듭니다. 안전한 사회는 관용과 배려가 거리마다 소리치며 울려납니다. 안전함은 나태함이 아니라, 깊은 힘이요, 용기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회복해야할 가치입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할 때마다 사랑과 관용과 배려를 되뇌이는 교역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역자 서로에겐 냉혹한 평가와 감시의 파놉티콘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비열한 거리일 뿐이었습니다. … 이 시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거리는 관용가 배려가 소리치며 울려나고 있습니까? 내 가족들은 나로 인해 안전함을 누리며 모험을 시도합니까?

농부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 주님께서 가지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안전판, 돌아갈 생명의 집이 되셨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모험을 즐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든든한 배경 삼아 용기있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까? 고난이 보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며 소명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 그리고 나아가 우리 또한 나와 함께 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안전판이 되고 돌아갈 집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하고 또 누려야 할 기본가치요, 관계성입니다.



4. 부족한 관계성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끝마다 관계를 뜻하는 ‘우리’라는 말을 넣는 것을 좋아합니다. 겉으로 보면, 관계성, 공동체성이 매우 발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몸의 한 기관이 자꾸 신경 쓰이고, 손이 자주 간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처럼, 자주 특정한 말이 사용된다는 것은 그것에 문제가 있고, 실은 부재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

유엔 자문기구인 SDSN(지속가능발전 해법 네트워크)에서는 매년 전 세계 나라들을 상대로 국민 행복도를 조사하여 순위를 발표합니다. 2017년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2018년 세계 행복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보고서는 10점 만점으로 발표되었고, 점수는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국민의 소득, 국가의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부패에 대한 인식(부패도), 사회의 너그러움(관용도) 등 다양한 기준을 종합한 점수입니다.

2018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는 핀란드가 선정되었습니다. 그 뒤를 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스위스가 선정되었습니다. 한국은 몇위를 했을 것 같습니까? 자그마치 57위 입니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은 경제규모가 10위 안에 들뿐 아니라, 기대수명이 여성이 세계최초로 90세(90.82세)를 넘어서 세계 1위, 남성 또한 84.07세로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영국 의학저널 ‘랜싯'에 실린 WHO논문).

그런데도 어떻게 해서 57위를 했을까요? 나머지 항목(선택의 자유, 부패도, 사회의 관용도)에서 거의 바닥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편없는 결과가 나온 겁니다.

물론 이해되지 못하는 바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다시피 대한민국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GNI(국민총소득) 250달러로 필리핀, 인도네시아는 물론 우간다. 튀니지, 카메룬 등 아프리카 국가 경제에도 못 미쳤던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단 기간 유례없는 압축 성장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고공 선진화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경제 강국의 동력이 된 지나친 근면과 사회 경쟁의식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성장하여,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게 되고 일그러진 행복의 가치 기준을 세습해 왔습니다. 그 결과가 앞선 통계에 반영되었습니다.

앞선 UN조사보고서인`2018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관계 만족 지수는 조사에 응한 세계 156개국 가운데 95위에 불과했습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만족 여부를 뜻하는 자율성 부문은 139위로 최하위권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가는데 어려움이 있고, 지나치게 타인에게 간섭 당하고 조정당하고 눈치를 보다 보니 ‘나’라는 존재감, 나와 너의 건강한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기대수명은 남녀 모두 세계 1위인 반면, 자살률 또한 11년 연속 세계 1위의 아픈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5. weary and burdened

마 11:2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을 NIV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무엇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것입니까? weary and burdened, 걱정과 근심을 안고, 생의 갖가지 짐을 진 채 힘겹게 하루하루 노정을 살아가는 우리 삶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로 만든 여행 가방, 불만 보따리, 한 쪽 어깨엔 권태의 더플백을 메고 다른 쪽엔 슬픔 가방을 걸쳤습니다. 등에도 의심의 배낭과 외로움의 침낭, 두려움의 트렁크 따위를 둘러멨습니다. 순식간에 공항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인부보다 더 많은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를 마감할 무렵이면 파김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답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농부가 되셔서 우리 삶을 일구시고 인도해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에겐 근심이 있고, 무거운 짐을 여전히 지고 있습니까?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괜히 센척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우리와 같은 몸으로 오신 주님도 근심이 있고, 무거운 짐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대적 중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힘센 척, 가면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길 힘을 주시길 날마다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때론 두렵다고, 때론 아프다고 고백했습니다. 때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버거웠기에 새벽에도 밤에도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농부되시는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힘들면 어디를 찾습니까? 스트레스 받으면, 근심이 쌓이고, 무거운 짐이 어깨를 누르면 누구와 만납니까? 무엇으로 해결합니까?


잠깐 시간을 내서 생각해 본다면, 다음 빈칸에 어떤 말을 채워 넣을 수 있을까요?

“( )만 있으면(된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괄호 속을 무엇으로 채우셨습니까? 아픈 데만 나으면' 입니까? 승진하기만 하면 입니까? 돈만 벌 수 있다면 입니까?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입니까? 아니면 나 혼자 살 수만 있다면 입니까? 괄호 속에 무슨 단어를 넣어서 내 인생의 문장을 완성하시렵니까?

채우지 못하는 괄호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γώ εμι, “내가 너의 빈 괄포다”라고 하십니다. 3천년 전 하나님으로 빈 괄호를 채웠던 다윗은 시 23:1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는 ‘여호와가 내 목자만 되신다면, 정말 행복할거야’라는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만 빈 괄호를 채우며 살아가겠다는 그의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 15:1에 바탕하여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 아버지 하나님은 나의 농부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만 내 삶의 농부가 되신다면 나는 정말 정말 행복할거야라는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으로만 우리 생의 빈 괄호를 채우며 살아가겠다는 우리 신앙의 결단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들이 허락되고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픈 이에겐 건강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이에겐 물질을 주셔서 우리의 빈 괄호가 채워지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채워지지 않던 우리 생의 괄호가 채워지는 은총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주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센척 가면을 쓰지 않게 하시고, 새벽에도, 밤에도 하나님과 친밀함을 쌓아가는 관계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 인해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되, 농부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우리 또한 함께 하는 사람들을 행복케 만드는 하나님의 빈 괄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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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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