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2.24 움오름 주일 설교 - "몸"(고전 15:12-19)




고린도전서 15: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설교문


2015년에 제작되어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아카데미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헝가리 감독 ‘라즐로 네메즈’가 연출한 ‘사울의 아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데, 가스실에서 학살된 유대인의 시체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은 유대인 특수직무반원인 사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울은 죽은 자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거두고 그 안에 있는 귀중품을 분리수거하며, 가스실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배출한 분비물을 닦아내고 시체들을 옮기는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입니다. 자신이 처리하는 나무토막 같은 시체들처럼 살아 있으나 죽어있는 그에게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가스실에서 어린 아들을 맞닥뜨립니다. 사울은 아들의 시신을 다른 ‘토막’들처럼 화장시킬 수 없어 시신을 숨깁니다. 그리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수용소 내에서 랍비를 찾아 헤맵니다. 그것은 아들을 종교적 절차를 거쳐 매장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이 무참히 살해되고 불태워 폐기되는 야만의 수용소에서 아들의 시신을 장례하기 위해 랍비를 찾아 헤매는 사울의 처절한 시도는 호흡이 멎고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죽은 몸이라 할지라도 존엄을 부여하는 죽음에 대한 태도의 각성이며, 나아가 인간 존재 의미와 구원을 찾아가는 사울의 몸부림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다른 두 모습 같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각성이 일어날 때 생명은 사울의 내부에서 새롭게 탄생합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삶과 생명의 근원적 의미와 존엄을 되새기곤 하는 것처럼 영화는 그렇게 죽음을 통해 오히려 생명과 구원을 깊고 진중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내용들은 우리들이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 속에 들어 있습니다. 천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교회는 하나의 신앙고백을 함께 고백해 왔는데, 그 중 그리스도교 가장 깊은 신앙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정되면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모든 주장의 기초가 무너져 허위가 되기 때문입니다.(15:14)

오늘 본문이 위치한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15장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적 확실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 부활은 <육체의 부활> 즉 <몸의 부활>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한 장에 걸쳐서 부활에 대해 강조하게 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일부에 부활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들이 퍼져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 특별히 육체의 부활, 몸의 부활은 가당치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생각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그림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은 단순히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그것은 육체 곧 몸의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고린도교회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였을까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생각의 결과를 따랐기 때문일까요? 그 이성을 넘어설 종교성이 부족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은 부정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과학적이고 이성적이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생각, 당시의 세계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당시 헬라인들은 육체는 죽음으로써 그 용도를 다하는 것이고 오직 영혼만이 계속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의 정신과 종교에서도 통용되던 상식에 속한 생각이었습니다. 당시의 철학자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법 하였을 것이라고 말한 학자도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돼지의 소망이다. 일단 육신의 더러운 장애에서 해방된 영혼이 결코 재수감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입니다. 즉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몸은 영혼의 감옥 정도로 이해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죽음은 영혼의 감옥인 몸에서 영혼이 탈출하는 계기로 파악되었고, 죽음을 통해 비로소 이데아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활동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영혼이 자유로워진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함으로써 감옥이었던 몸과 재결합 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로 이방인으로 이루어졌고 또 헬라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부활신앙을 부정하는 고린도교회 속에 나타난 신앙의 모습과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 속에는 유사한 흐름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과는 달리 부활신앙을 신앙고백의 초석으로 두는데도 말입니다. 겉으로는 그들과는 정반대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깊은 곳에서는 유사한 면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바로 영.육 / 성.속 이원론의 신앙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고린도교회의 죽음을 이해하는 사유방식이 신앙에 대한 오늘 우리의 생각과 이질감이 그리 크지 않고 자연스럽기 까지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추구는 곧 영적이지 못한 것이며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열망의 깊이 정도가 보다 깊은 신앙의 경지에 대한 척도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적 태도가 심화되면 이웃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책임과 윤리를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무언가 영적인 듯은 해 보이지만 오히려 생명과 인간의 존엄을 욕망의 가치 뒤에 두고, 혐오와 배제를 양산하며, 더 깊이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계시는 한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 신앙의 어두운 한 면이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우리는 영적 복음만 전해요. 다른 복음은 안 전해요."

"다른 복음은 뭐지요?" N목사에게 내가 물었다. 참 궁금했다.

"그건 육적 복음이죠."

"육적 복음은 또 뭔가요?"

"그건 물질적 복음이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체불임금이나 산재보상 같은 거 잘 받도록 도와주는 일은 물질적 복음이죠. 그런 거 때문에 사장이나 회사랑 싸우는 게 육신적 복음 사역이에요."

N목사는 작은 공장이 여기저기 산재한 지역에서 이주노동자교회 목회를 한다. 한국어로 설교하고 한국어로만 의사소통한다. 외국어를 못 해도 그 목회를 감당한다. 60대인 그는 엄마 같은 푸근함으로 이주노동자들을 돌본다. 그는 본래 이 지역에서 내국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자꾸 찾아와 이주노동자들 교회가 되었다고 했다. 내국인 교인들은 떠나고.

"어차피 이 세상은 멸망할 거 아니에요? 이 육신이나 물질 곧 썩어 없어질 거죠. 그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 살다가 빨리 하늘나라에 가야죠. 이 죄악 된 세상, 싸우고 투쟁한다고 바뀌겠어요? 다 거기서 거기지. 죄 짓지 않고 살다가 그 나라에 가야지. 저는 빨리 가기 바래요. 이 세상 미련 눈곱만치도 없어요."

듣고만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셔요? 성자 하나님께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오셨는데.."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건 육체를 잠시 빌리신 것뿐이죠. 목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죠.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노동자가 임금 몇 푼 더 받고 덜 받고가 뭐 그리 중요해요? 그거 갖고 다투는 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거에요."

N목사 앞에 앉아 그의 얘기를 들을수록 나는 점점 세속적인 인간이 되어갔다. 갈수록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어갔다. 하등 존재로 전락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좋은 말씀 잘 들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 있으면 회개하라는 말씀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아 빨리 일어났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활’교리는 반듯이 믿어야만 천국행을 보장받는 단지 보험료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부활‘은 이 땅에서의 삶과는 거리가 먼, 아니 오히려 이 땅에서의 가치와 의미를 옅게 하고 지워버리는 천상의 능력으로만 작용하는 신앙의 내용일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와는 반대로 이 땅에서의 관계, 그리고 이 땅에서 건설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훨씬 가까운 <부활의 육체성>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며, 그분의 부활이 그러하다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도 영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 몸의 부활>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분은 온전한 육체로 오셨고 온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으로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칫 육체를 생각할 때면 한계에 갇히고 억압된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성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고, 그렇게 만지고 감각하는 것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고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육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어쩌면 천사가 흠모하는 인간의 본질은 천사들은 가지지 못했으나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바로 우리 육체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고 고통과 기쁨을 함께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또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신앙의 육체성>이 부정될 때가 아니라 그 반대로 신앙의 육체성이 온전히 보전될 때 오히려 그 속에 참된 <영성>이 발현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이 몸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강조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육체의 연약함, 육체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지 않고서 부활을 논할 수 없지 않습니까. 부활은 이 땅에서의 삶의 자국과는 관계없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건조한 교리가 아니라 때로는 지난하고 고난으로 켜켜이 쌓인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만나고 겪어야 하는 육체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삶의 경험을 통과하면서 죽음에 대한 각성이 일어날 때 생명은 사람들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탄생하듯 부활은 죽음을 대면하고 맞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되고 그들 속에서 생명으로 고백됩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눅6:21-23)

<몸의 부활>, <부활의 육체성>은 이렇게 사.람.들.을 향합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 배척당하고 억울하게 욕을 먹고 악하다고 누명을 써서 내침을 당하는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합니다. 부활은 먼 미래에만 일어날 무엇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지금 몸으로 겪어내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참된 영성입니다.

최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베델교회는 지난해 10월 26일부터 탐라지안 가족을 위해 24시간 내내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이 해외뉴스로 보도되었습니다. 정치 탄압을 피해 9년 전 네덜란드로 망명한 탐라지안 가족은 정부의 추방 명령으로 네덜란드를 떠나야 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교회가 종교 활동 중에는 공권력을 집행할 수 없다는 법을 이용하며 가족들 보호에 나선 것이었는데, 작년 26일부터 24시간 연속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예배를 시작할 때는 당번표도 없었다고 합니다. 지난 10년간 예배 예식 내용을 한 장의 큰 서류에 복사해서 붙인 뒤 다른 목사를 찾을 때까지 그걸 따라 노래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교구 내 목사 몇 명과 시작한 '방탄 예배'의 소식이 퍼져나가자 그 소식을 접한 전국 목회자 수 백 여명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이 네덜란드개신교협회 대표자들은 정치권과 만남을 이어 갔고, 다시 심사를 받도록 1월 29일 합의했다고 합니다. 정부는 재심사 외에 '아동 사면 조약'의 개정도 추진한다고 하는데, 조약이 개정되면 600~700명가량의 아동이 혜택을 볼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베델교회는 그야말로 성경에 등장하는 <도피성>이 되었습니다. 베델교회의 목사님은 예배가 진행되는 중에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고 합니다.

"탐라지안 가족은 말 그대로 '기도와 경배로 지어진 집'에서 보호받고 있다"

<신영복 선생>은 한 사람의 일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를 가늠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데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 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저는 선생의 이 말은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대해서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육 이원론은 <몸의 부활>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몸의 부활>을 고백하는 신앙의 영역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관계를 넘어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계로 확대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정직하고 바르게 읽는다면 교회는 결코 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금요일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았던 이 땅의 사람들, 이 땅의 교회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자유로운 공기 아래서 자유민으로 숨 쉬며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일운동을 지켜 본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의 기자였던 <프레드릭 멕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수용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개인적으로 청경하게 되고, 안방에 갇혀 있던 여성들을 밝은 빛 가운데로 불러내었다. 그들은 서양 사상과 이상을 흡수했다. 선교학교에서는 잔다르크, 햄프튼, 조지 와싱턴과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으며,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보급하고 가르쳤다. 성서에 흠뻑 젖은 한 민족이 폭정을 만날 때는 다음 둘 중 한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 민족이 멸절되거나 폭정이 멈춘다.”

기독교 복음 속에 면면히 흐르는 부활신앙에 정직하게 응답했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구원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까지 닿았습니다. 오늘 나의 부활신앙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영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고백하고, 나를 넘어 이웃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나의 신앙 속에 들어와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걸음인지 몸의 부활을 말씀하는 말씀 앞에서 자문자답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의 걸음이 생각의 걸음을 넘어 몸의 걸음, 두 발의 걸음이 되고, 두 손의 섬김이 되고 그리하여 우리 육체의 온 몸의 찬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단지 조직체의 작동원리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교회는 ‘몸’입니다. 움오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참된 교회다움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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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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