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2.17 움오름 주일 설교 -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 14:28-31)

2019년 3월 1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4:28-31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설교문


1. 분분한 낙화

아직 눈이 내리고, 찬 기운이 덮고 있는 2월 중순이지만, 봄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 1월, 남도 제주에서는 벌써 홍매화가 피고 또 졌습니다. 육지에서는 아직 꽃 소식이 없는데, 섬에서는 이미 꽃이 지고 있습니다.

꽃이 지는 것을 노래한 시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형기 시인의 <낙화>입니다. 그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짐을 보고 어떤 이는 덧없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낙화가 없으면 열매도, 거둠도 없게 됩니다. 이를 아는 시인은 머무름의 시간을 끝내고 떠나가야 할 때 떠나가는 꽃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노래합니다. 꽃의 떠남이 열매로 채워지듯, 앞선 사람의 떠남이 뒤이은 사람들의 생명으로 이어지기에 낙화의 자리는 덧없지 않습니다. 되려 비장한 꽃의 아름다움이 자리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낙화>에서 다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한창 청춘의 때에 욕망의 고삐를 잡고 다스려 가고, 본성을 죽이지 않으면 내일의 열매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가을’이라는 열매의 날을 위해 젊은 날의 자신을 꽃답게 죽여갑니다. 하롱하롱 꽃잎이 지듯이 결별이 떠나갑니다. 그런데, 젊은 날에 이러기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무한리필될 것이라 의식 또는 무의식 중에 인식하는 젊은 시절엔 굳이 미래를 위해 떠나가고 양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소년, 또는 청년의 때에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있습니다. 재미없게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게 바로 ’평전’입니다. 청년들은 아직 삶의 후반전이나 결말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본인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치명적 약점입니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간접적으로나마 여러부류 사람들의 생의 결말까지 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33살 주님의 청춘은 꽃답게 죽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달려온 내 인생인데, 여기서 끝이라는 말씀입니까?’ 소리없는 아우성은 그들의 근심어린 표정을 타고 최후의 만찬 다락방에 흘러내렸습니다. 부르심과 보내심을 위해 마지막으로 나아가는 낙화의 때에 생의 의미와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2. Post Jesus

근심에 잡혀있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함께 하심의 방식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시대였으며, 눈으로 당신을 뵐 수없는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6절입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곧 있을 예수님의 부재 시기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익숙했던 것이 없어지는 시기, 믿었던 분이 사라지는 때를 두려워 하지 말고, 당황해 하지 말라 하십니다.

깊은 밤이나 새벽녘 분주함에서부터 떠나 고요 가운데 머물 때 성령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만지십니다. 연관없던 것들을 묶으시며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령님의 시대에 오늘날 교회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생각과 의식은 누구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합니까? 주님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 그 답이라 하십니다.

그 일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전부터 미리 계획하신 것, 바로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게 하시려 함이었습니다. 이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뒤늦게 깨달았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성령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 기록이 사도행전과 사도바울의 서신 가운데 낮낮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섭’이라고 하니, 참견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님과 자주 만나고 교제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자신을 내어놓게 됩니다. 이를 ‘자발적 간섭당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물가에서 발이 잠길 정도의 깊이에서는 내 맘대로 뛰거나 걷다가 물이 허리까지 오면 벌써 불편해 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물이 가슴, 어깨까지 오면 내 맘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물의 흐름에 내 몸을 맡겨야 하고, 그 흐름을 이용해야 합니다. 자발적 간섭당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께 점점 더 맡기고 그 간섭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 생존의 원리여야 합니다.

앞서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이유가 우연한 사건의 발생이 아니라, 섭리임을 믿게 하려 함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섭리(攝理)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고대의 종교나 인간역사는 운명을 이야기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고전 8:6)’한다고 증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섭리(divine providence)는 라틴어 providentia(예견, 사려)에서 왔습니다. 접두어 pro(ahead, 앞서, 미리)와 동사 videre(to see, 보다)의 합성어입니다. 즉 앞서 보다라는 뜻으로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전지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신 1:30-33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시는 아도나이,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에서 친히 우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오늘도 섭리하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도우시며 주님의 불과 구름으로 우리 갈 길을 지시하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간섭, 섭리에 우리 생을 맡기라 하십니다.



3.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주님의 부재의 시기, 성령님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존재방식은 어떠해야 합니까?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안으시고,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느끼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살라는 말씀에 이어 주님은 31절을 통해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의 의미는 다음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의 경계를 넘으라는 의미입니다.

: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만찬과 세족식, 그리고 이어 긴 말씀을 하셨던 주님은 그 자리를 떠나자 하십니다. 이제 부르심의 자리,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위해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불가시적인 것에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일반적, 세상적, 가시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실패요, 루저의 길입니다. 하지만,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된 성공의 길이요, 생명과 사랑의 길입니다.

신앙의 성장이 어디서 폭발적으로 시작됩니까? 바로 이 지점입니다. 가시적인 것에 고정되어 있던 우리 눈을 불가시적인 것으로 향할 때입니다. 우리 눈과 발은 가시적인 것에 매여있습니다. 그러면서도늘 불가시적인 부분에 대한 약간의 동경을 가지고 경계선에서 얼쩡거립니다. 그런 경계선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겁니다. 그 경계를 넘어 불가시적인 영원한 소망, 생명과 사랑의 가치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때 폭발적 성장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세상의 가치를 정하고 주관하는 “세상의 임금은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30절)고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가치라는 것은 인간이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지닌 유의미성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가치란? 얼마나 효과있게 사용되는지 그 효용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신앙인이냐는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어떤 가치에 따라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둘째, 때를 알며 살라는 의미입니다.

: 31절을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로 다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철저히 사랑하는지 세상이 알게 하려고, 나는 마지막 하나까지도 내 아버지의 지시대로 따르고 있다. 일어나 가자. 여기를 떠날 때가 되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근심의 원인, 예수님의 부재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온통 ‘마지막 하나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가치의 충돌과 그로 인한 근심은 제자들의 시대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시대에 동일하게 일어나는 문제요, 현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이냐 아니냐에 따라 기쁨과 근심의 온냉탕을 왔다갔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의 패턴을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 그 목적을 따라 살 때가 되었다 하십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기에 육이 필요로 하는 것에 민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필요를 인식하는 것과 점점 더 그것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것과은 질적으로 다릅니다.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 벧전 4:3을 통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왜 많은 사람들이 도와 한계를 벗어나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의 길을 걷습니까? 그것이 이 땅의 욕구와 필요에 맞춰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이면, 또는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뜻은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던 그런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며 이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가치에 따라 살 때가 되었다고 권면합니다.

셋째, 근심의 자리, 절망의 자리를 떠나라는 의미입니다.

: 요 14장은 제자들의 근심으로 시작해서 “여기를 떠나자”는 주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여기’란?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근심하는 자리입니다. 염려가 앞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하는 것임에 비해, 근심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떠나시는 일은 제자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떠나시는 일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때, 상상도 하지 못한 근심할 일이 맞습니다. 하지만, 근심하는 그 일이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기에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에 따르는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심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그 일을 붙들고 우울해져서 끝내 스스로를 절망으로 끌고 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절망으로 끌고 갈 그 근심의 자리를 떠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십자가를 위해 이제 걸어가자 하십니다.



4. “여기가 좋사오니…”

3년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처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맞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초점과 무게중심은 사역의 초반부와 후반부가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반부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치유와 이적에 맞춰 있었던 것에 비해 후반부는 수난과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에 맞춰 있습니다. 그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마 17, 막 9, 눅 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올라갔을 때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옷이 흰색으로 광채를 냈습니다. 주님의 이런 변화는 시내산에 올랐던 모세의 경우를 연상케 합니다(출 34:29).

그런데 주님은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변화산 사건을 보여주셨을까요? 눅 9:30-32를 봉독하시겠습니다.

  •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베드로를 비롯한 3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그날도 산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다가 깨어나 보니 주님이 모세,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31절을 보시면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모세(율법서)와 엘리야(예언서)가 영광 중에 나타나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세’라는 이 단어를 헬라어 원문은 ξοδος(엑소도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름아닌 떠남이며, 출애굽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으심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심을 보여주는 겁니다.문설주와 문인방에 뿌린 어린양의 피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으로 살던 이들을 해방시키고 살리시는 ξοδος(엑소도스)임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래서 세 제자들에게 변화산 사건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변화산 사건을 목도했지만 여전히 예수께서 자신들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유월절 어린양, 메시아이심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정신없는 사람처럼 겨우 한다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였습니다. 마 17:4입니다.

  •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변화산의 본질은 주님의 별세, ξοδος(엑소도스)였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광을 위해 먼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영광을 본 그 자리 ‘여기’에 머물기만을 원했습니다. 현재의 황홀과 만족에 취해 장차 나타날 영광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선의 가장 큰 적은 악이 아닙니다. 선의 가장 큰 적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차선’입니다. 여기가 좋다고, 지금 그대로가 좋다며 머물러 있는 안일입니다.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좋아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일과 게으름으로 그 자리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행해, 그리고 오늘 우리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31절)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존재방식은 어떠해야 할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더 느끼고,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발적 간섭당함의 그리스도인 되고 싶습니다.

안일과 게으름과 무지로 장차올 영광을 잃어버리지 말게 하시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대로 ξοδος(엑소도스)하셨듯이, 우리도 부르심의 그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만족과 황홀의 이 자리가 아니라,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을 위해 보이는 것 너머의 것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을 일구어가는 믿음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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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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