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2.10 움오름 주일 설교 -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31)

2019년 3월 2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4:28-31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설교문


1. 고 윤환덕 중앙의료센터장을 추모하며...


5일 동안의 설 연휴를 맞아 대략 30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남한인구가 51,157,935명(2018 추계)이니 3/5 이상의 인구가 고향을 찾은 셈입니다. 이렇게 모두들 가족을 찾는 기간에도 연휴내내 주야간 당직을 서며 응급환자들을 돌보던 고마운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분들 중 우리나라 응급의료를 총괄하던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지난 2월 4일(월) 과로로 별세했습니다. 남들이 모두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에 생명을 구하는 과중한 일을 감당하다 정작 본인은 가족들에게 “안녕”이라는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이별했습니다. 심정지되는 그날도 홀로 집무실에서 마치 평소 일하는 듯한 모습으로 책상 앞에 쓰러져 가셨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습니다.

오늘(2월10일) 아침 9시에 윤 센터장님의 시신이 운구되어 장례가 치뤄졌습니다. "오늘은 몸이 세개, 머리는 두개였어야 했다.내일은 몇개가 필요할까?"라고 적었던 고단했던 그의 삶,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은 채 돌아보지 못했던 이웃사랑의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또한 몇몇 사람의 사명감과 희생으로 매꿔지는 낙후되고 열악한 공공의료와 응급의료가 아니라, 그가 생전에 꿈꾸었던 응급의료체계의 시스템화의 실현으로 의사도 환자도 살만한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가 생전에 남겼던 한 마디를 되새겨 보며 그분을 추모합니다.

"당신이 남을 돕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을 돕지 않게 됩니다."




2. 몇시를 살고 있는가?


새해가 되어 한국나이로 50세가 되면서 평소보다 더더욱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이고 의미있게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지금의 기대수명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 영국의 신학자였던 레슬리 웨더헤드(1893년-1976년) 박사의 시간가치 인식표가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웨더헤드 박사는 하루를 평균 수명으로 계산함으로써 시간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보여줬습니다. 만약 나이가 15 세인 경우 시간은 오전 10:25이며, 나이가 20인 경우 시간은 11:34라고 했습니다. 25세인 경우 시간은 정오가 지난 12:42 pm이며, 30세인 경우 시간은 1:51입니다. 35세면, 그 시간은 3:00, 40세인 경우 오후 4:8이 됩니다. 45세의 시간은 오후 5:15이며, 50세가 되면 시간은 벌써 오후 6:25이 됩니다. 55세까지는 저녁 7:24이며, 60세 인 경우 시간은 저녁 8:42입니다. 65세면 시간은 밤 9:51이 됩니다. 그리고 만약 70세라면 생의 시간은 자정을 1시간 남겨둔 밤 11시가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웨더해드 박사가 살던 시대와 50-100여년 차이가 나기에 당시의 평균수명과 분명 많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연령만큼 산다는 보장이 있는 생이 아니기에 인생시간표는 여전히 무게있게 다가옵니다. 웨더해드 박사의 분류표에 의한다면 저는 벌써 해가 저문 저녁 6:25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농축있는 삶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 39:4-7을 통해 생의 시간에 대한 그의 고민과 결론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왕으로서 누리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새벽 찬이슬을 맞아야 했고, 풀을 뜯어 끼니를 이으며 죽음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이전에 이러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다윗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에서 생각지도 못한 도망자로 전락했던 것처럼 우리도 어느날 갑자기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가볍게 여기며 갔던 병원에서 비통한 통보를 받고 암환자가 됩니다. 회사에서 해고되기도 하고, 장사가 안되어 폐업을 겪기도 합니다. 틀림없이 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자리를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도 합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 참 당혹스럽고 견디기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워낙 인생 아니었던가요? 아들의 반란을 피해 광야로 다시 내몰린 다윗은 빈들에서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시 39:4입니다.

  •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왕궁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다윗은 본인이 아주 강하다고 생각습니다. 10대에 그는 3미터에 가까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으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사였습니다. 그의 수하엔 그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에 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며 싸울 용사가 허다했습니다. 그는 왕이었으며, 탁월한 리더였으며,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부족함도, 약점도 찾아 볼 수 없는 완벽남의 상징처럼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차없이 허물어진 인생 폐허 위에서 그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과 더불어 그림자같은 인생의 덧없고 허무함을 깨달았습니다. 시 39:5입니다.

  •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을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광야생활하던 시절에는 몰랐는데, 왕이 되어 사는 동안 다윗은 어느듯 인생은 화려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산해진미와 각양 채색된 비단옷에 권력이 더 해지니 그에게 인생은 참으로 살만한 것이었으며,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도망자가 된 그의 눈엔 인생이 더이상 화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술이 깬 사람마냥 정신이 확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도 화려해 보였던 인생이 한낱 한뼘 길이처럼 헛되어 보였습니다. 왕궁이 아닌 광야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자다 보니 인생의 본질이 보였습니다.


생의 본질과 그 허망함 앞에 선 다윗은 그 해결방법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시 39:7입니다.주여,

  •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윗의 이 결단과 기도는 생의 마지막 희망이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신앙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가시적이고 가변적인 세상의 가치에 희망을 걸고 살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로지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겠다는 그의 결단입니다.


실패 앞에 마주했을때, 자신의 무능과 무력을 절감할 때, 인생의 허무와 연약함이 생의 발목을 잡을 때,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이상 소망도 희망도 없다고 절망할 때, 다윗의 기도는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돌리게 합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끝까지 붙잡아야 할 분, 아니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계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 힘으로 새로운 삶의 장을 열게 하시고, 새로운 모습으로 생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바라기는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는 다윗의 고백과 기도가 우리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아니라, 지금부터 생의 매순간 마다 드려지는 우리 삶의 고백이요, 결단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3.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십자가를 앞에 둔 주님은 불안과 염려에 떠는 제자들을 되려 위로하셨습니다. 그들을 격려하셨으며 그들에게 주님의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the messege 성경은 이와같은 말씀의 시작인 요 14:1을 이렇게 현장감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일로 당황하지 마라. 너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실망하며, 불안해 하며 근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황스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더 이상 진행시키지 말고 멈추라고 하십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그 하나님의 손과 계획 안에 우리 인생이 있는데, 왜 당황하며 근심하는지를 되묻고 계십니다.

내 바램보다 좀 많이 틀어졌다고,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내려졌다고 당황하고 쫄아서 믿음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처신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련이 알아서 해 주셨을까라고 믿으며 우리 믿음을 새롭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믿음의 순도와 농도는 잘 나갈 때, 평안할 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혹스런 일 앞에서, 실패와 절망의 자리에서 가감없이 나타나고 표현됩니다.

본문 28절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근심 대신 기쁨을 선택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였다면(사랑해서 그 말씀을 믿고 따랐다면…) 도리어 주님이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주님의 십자가행)을 기뻐하였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28절 하)고 하셨습니다. 얼핏보면 이 말씀은 비교급화 되어 하나님 아래 예수님의 서열화를 의미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이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을 비롯한 이단들이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보다 못한 하위(下位)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학은 예수님을 피조물화 시켜 기독교신앙을 삼위일체의 유일신 신앙이 아닌 다신교로 잘못 인도했습니다.

요 10:30의 말씀처럼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실 뿐 아니라, 빌 2:6의 말씀처럼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 9:6의 예언처럼 주님 자신이 기묘자와 모사이며,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주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자발적으로 자기를 종처럼 낮추고 철저하게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곧 벌어질 피하고 싶기도 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상황도 받아들였습니다. 기쁘게 그 길을 걸어가시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그 일을 설계하시고, 그것을 위해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크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구조 건축물은 송파구에 있는 롯데월드타워(Lotte World Tower)입니다. 지상 123층, 지하 6층, 높이 555m의 마천루로서 세계에서 6번째로 높고, 아시아에서 3번째로 높고, 대한민국에서는 최고층 건물입니다. 그런데 이 높은 건물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롯데월드타워를 설계한 건축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이 세상을 직접 디자인하고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는데, 뭘 그리 근심하느냐고 하십니다. 가장 잘 아시고, 해결할 능력도 있으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뭘 그리 초조하고 안달해 하느냐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고 강조하십니다.



4. 두려움을 넘어 믿음으로


<순종>, <친밀감>, <분별력>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한 존 비비어는 <두려움>이라는 책을 통해서 두려움의 실체를 밝힘과 동시에 두려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우울과 절망과 혼란의 덫에서 자유하며 그 영향력을 타파해야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존 비비어는 두려움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육체와 강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강력한 두려움 앞에서는 압도되는 이유가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우리들의 '능력'과 '권위'를 훔쳐가기 위해서 두려움을 사용합니다.

사람은 자신보다 두려워하는 존재를 섬기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순간 자신의 능력과 권위는 두려워하는 존재를 위해서만 사용되고 맙니다. 존 비비어의 말처럼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위협에 맞서 싸우고 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근본 원인이 아닌 결과적 현상만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협하는 세력은 쳐부수지 않고 실망과 혼란, 낙심과 절망과 같은 결과적 현상만을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두려움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지붕에 구멍이 뚫린 채 비에 젖은 가구가 방치된 집에 살고 있는 주인과 같습니다. 근본원인인 지붕은 고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계속 되는 비에 젖은 가구와 침구 만을 바꾸다 인내심이 소진되어 다 포기해 버립니다. 종내엔 아예 복구 작업을 할 생각조차 않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두려움의 건너편에 그와 맞설 가장 강력한 도구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나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심을 아는 것 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그것은 내 인생이 하나님 없이는 한뼘 길이의 그림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하나님 없이는 가차없이 허물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설혹 내 인생이 원치 않는 상황과 결과에 직면하였다 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새롭게 빚어질 것임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둘째,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영원한 가치에 눈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신뢰하기에 금방 사라질 세상의 화려함과 가치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기 위해 온 힘을 다 쓰고 남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감내하며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새해를 맞아 모두들 기대와 소망을 다져가던 지난 1월, 저는 지난 3년을 포함해 만 5년 동안 강의해 왔던 학교로부터 계약해지통보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저뿐만 아니라, 강사 전체가 계약이 연장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직장에서 해고된 셈입니다. 전화로 통보를 받을 당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맘 한켠에 휑하니 바람이 붑니다. 나이 50에 가장으로서 어떻게 해야할까 하루에도 별별 생각들이 머리 속을 지나갑니다.

이런 저를 향해 여러분들은 뭐라고 권면하시겠습니까? … 성경은 ‘나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가시적이고 가변적인 세상의 가치에 희망을 걸지말고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니다.

혹시 원치않는 상황과 당혹스러운 결과 앞에서 실망해 계십니까? 인생의 위기를 만나 근심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믿을 때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입니다. 하루 아침에 왕궁에서 광야의 도망자로 전락했던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드렸던 진심어린 고백의 기도를 우리의 입으로 드릴 믿음의 때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보다 더 크신 하나님~

실패 앞에 마주했을때, 우리 자신의 무능과 무력을 절감할 때, 인생의 허무와 연약함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때,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이상 소망도 희망도 없다고 절망할 때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4-7)

이제 우리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돌립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끝까지 붙잡아야 할 분, 아니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계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 힘으로 새로운 삶의 장을 열게 하시고, 새로운 모습으로 생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 두게 하옵소서. 세상의 것을 가지기 위해 온 힘을 다 쓰고 남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감내하게 하옵소서. 그러한 주님의 증인으로 남은 이 생애를 순도있게, 농도있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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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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