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2.09 움오름 주일 설교 - "유익하다고 3"(요 18:12-14)

2월 17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2~14

12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13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14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설교문

1. 사장으로 산다는 것


1인 기업(or 소상공인)이든 대기업이든 판매하는 제품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기업은 2가지를 목표로 합니다. 하나는 수익성(이윤창출)이고, 다른 하나는 유동성(지급능력: 주식이나 채권이 손실없이 현금과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고 작건간에 ‘사장’으로 통칭되는 오너가 되면 어떻게 하든지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지난 주중 <사장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처음엔 가볍게 손에 든 책이었지만, 읽어가면 갈수록 무거움과 공감으로 채워져 갔습니다. 사장이라는 자리가 이러려니하고 단순히 생각했던 것들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실감있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사장으로 산다면 아무도 부럽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장들의 목소리를 수집해 놓은 그 책 속에선 권한 그 이상의 책임과 의무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고민하는 그들의 면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의 글을 읽을 때 참 짠하게 다가왔습니다.


“기업이 망하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두려움을 갖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요즘 징기즈칸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몽골군의 개방성, 유연성, 창조성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한때 한국의 노키아를 꿈꾸며 팬택 신화를 이끌었던 최고경영자가 2005년 5월 4일자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했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위 발언처럼 CEO들은 잘 될 때에도 늘 긴장합니다. 공부하며 미래를 대비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라고 불리거나 한때 천하를 호령하며 세계경영을 외치던 회사거나 문을 닫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물론 위 인터뷰를 했던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기업의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사장은 기업의 제일 목표인 ‘이익을 내는 것’ 이전에 ‘생존’을 위해 발버둥칩니다. 종업원들은 매달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사장은 그 월급을 맞춰 줄 수 있도록 노심초사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2. 이상한 사장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보통의 사장과는 확연히 다른 사장을 만납니다. 좀 더 얼밀히 말씀드리자면, 이익을 챙기지 않는 이상한 사장입니다. 그 이상한 사장은 마 20:1-16에 등장합니다. 오랜 세월 ‘포도원 일꾼 비유’라고 불렸던 이 비유의 핵심은 포도원 일꾼이라는 피고용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되려 그들을 고용한 포도농장의 사장에게 있습니다.


이상한 포도농장 사장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 20:1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예수님은 ‘천국이 포도농장 사장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포도농장 사장은 이 땅의 방식과 문화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기에 예수님은 그렇게 평하셨을까요?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자기 농장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06시)부터 인력시장으로 나서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일당 한 데나리온(10만원)을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이후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등 총 5회에 걸처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추가 고용합니다.


하루 일이 마친 오후 6시에 포도농장 사장은 일꾼들에게 그날의 품삯을 지불케 합니다. 그런데 사장의 임금지불방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항의를 합니다. 그들의 볼멘 소리를 듣고 사장이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당신이 왜 불만이냐?”며, 자신은 약속을 지켰으므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선한 뜻을 악하게 보는 처음 온 품꾼들의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그렇다면, 포도농장의 사장의 이야기엔 어떤 부분들이 당시 평범한 일상과 달랐을까요? 무엇 때문에 가장 먼저 고용되었던 일꾼들이 불만을 품고 항의했을까요? 여기엔 모두 4가지의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포도농장 사장은 청지기(마 20:8)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고용에 나섰습니다.

: 고대시대 큰 토지를 가진 사람의 집에는 보통 다음의 7가지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 주인, (2) 주인의 아내와 자녀, (3) 청지기, (4) 감독, (5) 영구 고용 직원, (6) 날품팔이꾼, (7) 노예


이에 비춰본다면, 포도농장 사장은 굳이 자신이 나서서 (6)번째 계급인 날품팔이꾼을 모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일을 총괄하는 (3)번째 계급인 청지기를 시키면 될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장들도 통상적으로 그렇게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사장은 본인이 인력시장에 나가서 직접 고용에 나섰습니다.



둘째, 사장은 한번에 날품팔이꾼을 고용하면 될 일을 굳이 다섯 차례에 걸쳐 추가모집했습니다.

: 신학교 다니던 시절 방학 때 생활비 마련을 위해 막노동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보통 새벽5시 - 5시 30분 사이에 사람들이 인력사무소에 도착해서 도착순서대로 출석부에 자신의 이름을 기재합니다. 그리고 6시경엔 각 작업장별로 호명되어 떠납니다. 아무리 늦어도 아침 7시면 그날 일하러 나갈 사람은 대부분 뽑히고 마무리됩니다.


포도농장 사장이 새벽 6시에 첫번째 품꾼들을 선발해 갔듯이 그렇게 데리고 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이 사람은 6시에 이어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마감 1시간을 남겨둔 오후 5시에 조차 추가적으로 품꾼들을 모집해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농장에 일할게 많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해보고, 또 시켜본 사람들은 압니다. 그날 할 분량이 얼마 정도이며, 얼마 만큼의 사람이 필요한지 감이 있습니다. 포도농장 사장이 일을 one day, two day했겠습니까? 그도 알만큼 다 압니다. 그러니 하다보니 일거리가 많이 생겨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설혹 일거리가 많아서라고 하더라도 이른 아침에 단번에 고용해서 데리고 가지 저 이상한 사장처럼 결코 5차례에 걸쳐 추가고용하지 않습니다.



셋째, 품꾼들에게 주는 일당과 지불순서가 이상했습니다.

: 사장은 포도원에 오후 5시, 마감 1시간을 남겨 두고 온 이들에게 가장 먼저 품삯을 주라고 청지기에게 명했습니다. 여기서 품삯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아랍어 역본들은 그 뜻을 정확하게 반영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치 임금을 주어라”


당시 하루 종일치 임금은 1데나리온, 곧 새벽 6시에 고용되어 온 사람들에게 약정한 금액이었습니다.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장은 굳이 하루 종일치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간제로 계산해서 최저시급 8,590원을 지급해도 그들은 감사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 공칠번 했는데 그래도 1시간 일했다는게 어딥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농장 사장은 이상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시급 8,590원이 아닌, 하루치 일당인 10만원을 지급하라고 청지기에게 이상한 명령을 했습니다.


나아가 더 이상한 것은 설혹 그런 자비롭고도 자선적인 명령을 했더라도 통상적으로 해 왔듯이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처음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지급해서 보내고 난 후 뒤에 온 사람들에게 지급했으면 됐습니다. 아니면, 각자의 일당을 타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보안을 유지해 지급했다면 먼저 와서 일했던 이들이 불평을 표할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지급할 품삯과 순서를 의도적으로 바꾸고 자신의 뜻을 공공연하게 청지기에게 명령함으로써 분란을 조장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넷째, 주인이 불만을 표하는 첫번째로 고용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 고대사회에서 제1계급의 사람이 6번째 계급에 있던 날품팔이꾼에게 자신의 행동과 이유를 설명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경제적 계급이나 그에 따르는 신분 차이로 인해 주인은 그들의 항의를 무시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포도농장 사장이 피고용인들과 체결한 근로계약을 위배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불평하는 그들의 소리를 들을 필요도 또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사장은 그들의 불평을 일일이 듣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3. 이상한 포도농장 사장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면, 이상한 포도농장 사장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토록 일상적이지도, 또 시대의 풍조에 역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서 무엇을 전해주고 싶으신 걸까요?


첫째,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케 합니다.

: 사람들은 오랫동안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정의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래서 ‘왜 똑같은 일과 시간을 일하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이 달라야 하는가?’라며 동일 임금과 대우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사장이 일한 것보다 임금을 적게 지불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많이 지불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놀라운 은혜로 가득한 평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평등이 불편한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느끼는 이들이 이런 평등에 분노합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며, 자신들은 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그들의 외침은 약정 임금을 다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장의 정의와 자신들의 공평이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사장이 최초 새벽 6시에 일꾼을 모집할 때 그들에게 분명하게 통상임금인 1데나리온(10만원)을 일당으로 약정했습니다. 그런데, 9시, 12시, 오후 3시에 나가서 모집할 때는 “상당하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상당하게’라고 번역된 δίκαιος(디카이오스)는 ‘마땅한’이라는 뜻과 더불어 ‘의로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농장 사장은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의’에 합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언질한 겁니다. 거기다가 묘하게도 오후 5시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는 아예 품삯 자체에 대해 언급조차하지 않고 그냥 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고용된 품꾼들이 우리의 최저시급처럼 사회적 통용된 임금기준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원 사장의 맘 속에는 하루 벌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진 가장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책임감으로 인해 해지기 직전까지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던 그 사람들에 대한 긍휼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단순히 일당을 적선하는 자선이나 시혜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과 가족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일을 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가족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경제적인 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정의였습니다.


반면, 가장 먼저 고용되었던 품꾼들이 사장이 말하는 정의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평 또는 공정과는 다르다며, 그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새번역)며 항의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똑같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ἴσος(이소스)인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말할 때 그 기준으로 제시한 개념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 속에서 사장의 정의와 처음 온 품꾼들의 정의가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포도원 주인의 정의(δίκαιος, 디카이오스)는 구체적으로 ‘똑같이’ 누리는 정의(ἴσος, 이소스)였습니다. 이 대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삶과 이 땅의 삶을 사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이 다름 속에 사람을 바라보는 가치의 차이와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 정의를 권고합니다. 그것은 가진 사람이 자신의 배경과 권한을 다 사용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일정 부분 포기함으로써 공동체 전체를 살리고자 하는 정의입니다.


이상하리만치 선한 그 사장은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요구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악한 요구에 맞서 행동했습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복지와 평안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 아랫사람 시키면 될 일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챙기는 수고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그런 사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상한 사장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요, 주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 자연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다 물물교환하는 것으로 시작한 인간사회의 경제활동은 잉여생산과 대량생산을 거치며 시장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시장 논리에 친숙한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시장 논리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시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설명한 논리입니다.


생산과 소비, 수요와 공급에서 자유롭게 경쟁을 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것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에 서 있는 겁니다. 이게 공정 또는 공평이고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가 어떻게 공정하다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가진 이들의 공정이요, 정의일 수 있습니다.


하나 가진 이들이 열을 가지려 하고, 열을 가진 이들이 백을 가지려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되려 역행의 길을 걸으십니다. 이익과 힘에 의해 지배당하는 세계를 향해 당신의 것을 내어주십니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섬기는 세상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다르게 살아가는 삶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토록 이상한, 아니 다른 삶을 보여주신 포도원 주인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 만족한 자의 윤리


기업의 제일되는 추구가치는 당연히 ‘이익’입니다. 그래서 이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사업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판가름의 기준이 됩니다. 물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 있기도 합니다. 정통적인 기업가치 추구와는 달리 사회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일합니다. 이런 기업을 일컬어 ‘사회적 기업’이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 사회적 기업의 원형은 이상한 포도원 주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의 핵심은 고용주가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후하게 대하며 긍휼히 여긴 나머지 자신의 권한을 일부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익을 위해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을 위해 일을 만드는 사람 같습니다. 그가 한 시간 남짓 일한 사람에게도 종일 일한 이들과 똑같은 일당을 지급했다는 것은 엄격한 공정과 공평이 정의의 잣대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새로운 정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으로서 적게 가진 사람들, 없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넉넉함과 책임의식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방식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2월 4일 한 일간지에 이소영 교수(제주대 사회교육과)의 ‘만족한 자의 윤리’라는 제하의 칼럼이 마음을 울리며 들어 왔습니다. 내용인즉, 눈을 뜨면 주방 개수대의 수세미가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집에 살다 주방과 침실이 분리된 집으로 이사를 가니 너무나도 좋더라는 겁니다. 더 큰 집에 대한 박탈감은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의자 네 개 딸린 식탁에서 친구들을 대접할 수 있는 공간. 이 정도로 충분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의 만족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누구든 본인처럼 부엌과 침대가 분리된 보금자리를 가질 수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매달 봉급 받고, 연금이란 걸 통해 노후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며, 일하러 외지 가면 본인처럼 ‘가성비’ 좋고 안전한 숙소에서 자면 좋겠다고 합니다. 아니,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강변합니다. “가진 자들이 얼마나 더 소유했는지에 분노하지 않는 나는, 덜 가진 이들이 나만큼이나마 가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민을 놓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그건 ‘만족한 자’의 윤리적 책무이다. 이를 저버리는 순간 자신의 물욕 없음을 내세우며 안빈낙도 운운하는 위선자로 전락할 테니 말이다.”



5. 외롭기로 작정하면


2천년 전 팔레스타인 한 켠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만족한 자의 윤리, 창조주의 윤리적 책무였습니다. 세속적 가치가 공정과 공평이요, 힘이 정의로 받아들여지던 세상을 향한 반란이었습니다. 가진 자들이 더 갖기 위해 적게 가진 자들의 손의 것을 착취하는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 우리도 그런 구조를 당연시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선 타인의 형편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뻔뻔함으로 무장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삶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입니다. 하지만,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고 있는 기득세력인 기독교는 자신의 가진 것을 내어놓고, 내려놓는 것을 거부합니다. 되려 더 나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세력이 되어 다른 이들을 향한 자비를 걷어낸 야멸찬 극우의 종교, 위선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안녕과 질서와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유익을 전제한 조건일 따름입니다. 모두를 위한다며 하나의 죽음과 희생을 당연시하는 전체주의적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탁하신 삶은 되려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은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그리며 걸어가는 삶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마저 사용치 않고 누군가를 위해 내려놓는 삶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힘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영향력없는 종교로 전락한 것은 어떻게든 내 권리 주장하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공정을 입은 정의 때문은 아닐까요? 지난 주중 읽은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 가운데 한 부분이 마음에 크게 부딪히며 포말을 일으켰습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하략)…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는 싯구가 도전이 되었습니다. 외롭지 않으려 하니,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가기로 목숨 걸지 않으니 늘 지는 해가 문제가 되고, 핑계가 되는 것은 아닌지요? 그 결과 주님은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정의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셨지만, 우리는 그저 “여기가 좋사오니!”라며 초막 셋을 짓고 현실에 안주해 온 것은 아닌지요? 고전 10:24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권고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어 빌 1:20-21의 말씀입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현실이 참 빡빡합니다. 앞날은 불투명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자기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데, 남을 돌아보고, 또 돌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 사치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내 권리 다 찾으며, 손해보지 않기 위해 항의하고 분노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나의 이익을 모두의 유익 속에 포장하여 적극적으로 내 이익을 챙기며 가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은 포도원 주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번거로움을 친히 감내하시며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공정과 공평을 주장하며 더 가지려는 힘의 정의를 향해 사랑이라는 정의로 세워지는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

이제 우리가 이 새로운 세상을 그려가게 하옵소서. 우리도 이 새로운 세상을 꿈꿔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먼저 은혜를 입은 이로서의 마땅한 책임, ‘만족한 자의 윤리’요, 외롭기로 작정한 자의 몫이게 하옵소서. 가기로 목숨 건 그리스도인의 걸음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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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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