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2.03 움오름 주일 설교 - "나의 평안을"(요 14:25-28)

2019년 3월 2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4:25-27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설교문


1. 성공학의 아버지와 두려움


성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나폴리언 힐(Napoleon Hill, 1883-1970)은 수많은 기업과 학교에서 성공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강연했습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성공학을 강연했지만, 실제 자신의 삶에 그 원리와 원칙들을 적용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극심한 좌절과 실패에 시달렸습니다. 


성공학 연구의 계기는 이러했습니다. 25살 청년이었던 그가 작가를 꿈꾸며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 감사하게도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앤드류 카네기를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카네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성공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서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을 찾고,  제가 발견한 모든 것을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어린 청년의 당찬 포부를 들은 카네기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성공한 사람들 507명을 소개해줄 테니, 앞으로 20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해 보세요.”


그리곤 하나 단서를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20년간 나는 당신에게 한 푼도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세요"


나폴리언 힐은 당황스러웠지만, 카네기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카네기가 소개해 준 토마스 에디슨, 존 록펠러, 핸리 포드 등을 직접 만나 그들의 성공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그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500명의 성공한 사람들 뿐 아니라, 25,000명의 실패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하고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리언 힐은 그가 만났던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17 가지 성공 법칙과 30 가지의 실패하는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힐은 그 법칙을 들고 미국 전역을 돌며 강연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과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이에 힐은 자신이 성공학을 완벽히 체계화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출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0년의 노력 끝에, 25살 청년 때 꿈꾸었던 작가라는 그의 소원이 드디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출간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암흑가의 어떤 조직이 힐의 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부정부패가 드러난다는 오해를 하고 살해 위협을 했습니다. 위협이 있은지 얼마있지 않아 책 출간을 책임졌던 편집장이 해당 조직의 총에 살해되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힐은 결국 자신의 집을 버리고, 친척집으로 도망쳤습니다. 20년간 연구한 성공학을 출판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계속된 살해 위협 속에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줄곧 숨어 지냈습니다. 피치못해 외출할 때는 항상 주머니 속의 권총을 꼭 쥐고 다녔습니다. 


공포감에 휩싸여 수개월을 숨어살자 그의 멘탈은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오랜 세월 성공학을 연구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불태워온 그였지만 어느새 두려움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극도로 예민해졌고, 우울했습니다. 늘 걱정하며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성공의 법칙을 강의하던 그였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선 무색할 정도로 비굴해 지고, 한없이 작아진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강조했던 것을 자신의 삶에 하나도 적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굴욕감을 처절히 느꼈습니다. 


실패 해결책이랍시고 자신있게 외치던 17가지 성공원칙도 두려움 앞에서 무력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줬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을 경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들려온 살해위협자들의 체포와 수감 소식에 힐은 비로소 은둔생활을 풀고 원래의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깨어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힐은 현대인을 파괴시키는 7가지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첫째, 가난에 대한 두려움

둘째,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받게 될 비난에 대한 두려움

셋째, 질병의 두려움

넷째, 사랑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다섯째, 늙음에 대한 두려움

여섯째, 자유의 상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일곱째, 죽음의 두려움 




2. 사투르누스와 두려움


생명과 능력의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가난, 비난, 질병, 사랑의 상실, 나이듦, 자유의 상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점차 사라지거나 간에 사라진다는 실존적 운명을 안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진정 숙명이라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간에 인간의 저 밑 속에서부터 존재하는 두려움은 떠 안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제거하고 떨쳐내야 할까요? 떨쳐내야 한다면 어떻게 제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앞선 성공학의 아버지 나폴리언 힐의 경우처럼 두려움은 당당하고 자신에 찬 사람조차 한순간 무기력한 패배자로 전락시킵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지닌 그 어떤 누구도 아마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떤 단어에든지 붙으면 그 단어가 가진 가진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힘이 있는 dis라는 접두사처럼<순종(odey)은 불순종(disodey)이 되고, 존경(respect)는 불경(disrespect)로 변하고,  관심(regard)은 무관심(disregard)으로, 능력(ability)은 무능력(disability)으로 약속(appointment)은 낙심(disappointment)이 됨> 인간 안에 있는 온갖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두려운 존재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곧잘 화가들의 작품주제로도 사용되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세기 스페인 화가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23, 프라도미술관, 마드리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괴물이 아이를 잡아먹는 그림입니다. 그 괴물 사투르누스(Saturnus)는 다름아닌 그리스 신 크로노스(Chronos)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이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그는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먹어치웠습니다.


신화에 바탕한 그림 속 괴물의 이미지와 사체는 누구 보더라도 끔찍한 광경입니다. 아이의 머리와 오른 팔은 이미 잘려나갔고, 왼쪽 팔이 괴물의 입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피가 아이의 팔과 어깨를 따라 흐릅니다. 양 손으로 아이를 움켜진 괴물의 손과 굽혀진 다리는 온 힘을 다 모으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괴물과 아이는 크기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거인의 후예같은 괴물은 그렇게 압도적인 힘과 체격으로 아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토록 강력한 힘으로 다른 이를 파괴하는 이 괴물의 얼굴에 두려움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크게 부릅뜬 눈에는 또 다른 공포와 슬픔이 전해집니다. 어쩌면 괴물의 얼굴에 드러워진 두려움은 항상 자신의 아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을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늘 두렵습니다.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삶, 그것은 삶의 시간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us)의 삶입니다. 살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불안의 삶입니다. 고통의 근원은 해결하지 못한 채 언제일지 모르는 죽음의 날을 생각하며 손놓고만 있는 불행한 삶입니다. 


점차 심각해져 가는 청각장애를 안고 살았던 고야는 스페인 카를로스 4세의 수석 궁정화가였습니다. 궁정화가였으니 안락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과 스페인 내 정치적 혼란에서 인간의 광기와 잔혹성, 무지와 공포심 그리고 환멸을 경험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대중의 무지를 이용해 마녀사냥을 일삼던 교회와 왕정의 형태를 보며 가슴아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끔찍한 형상의 이미지와 어두운 채색에 담았습니다. 신화나 성서, 축제와 민간 행사를 풍자한 표현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내면과 어리석음, 고독과 죽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신 안에 내재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타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던 인간의 어리석음과 광기는 고야 시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잡아먹어야 한다는 살육의 프레임은 여전히 효과적인 처세술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실제 경기도에 있는 어느 시에는 두 집안이 오래 전부터 번갈아가며 국회의원을 배출해 오고 있습니다. 이름난 사학재단을 두기도 한 그 집안들이 그렇게 기를 써서 정치에 나서는 이유는 특별한 시대적 사명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상대편 집안에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투르누스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3. 제자들의 두려움


서양미술사상 가장 처절한 카니발리즘(식인주의)을 보여준다는 고야의 그림은 실은 인간 내면의 잠재한 왜곡된 두려움의 형상화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두려움에  잠식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자 인간 속의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불과 몇시간 후면 예수님은 영어의 몸이 되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떠나간다는 주님의 이상한 메시지와 싸한 분위기로 인해 제자들은 금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한껏 부픈 기대를 안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는데, 이건 뭔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가시겠다는 뜻인 것 같아 여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해 25절-26절을 통해 예언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나게 해 주시며, 왜 말씀하셨는지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 했습니다.


이어 여전히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로 당신께서 평안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이 무엇이기에 근심과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힘과 근거가 된다는 것일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평안이라는 헬라어 ‘에이레네(ερήνη)’는 전쟁과 대립적인 개념,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기인되는 상황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의 위협이 없는 번영이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에이레네(ερήνη)’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의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샬롬(שלום)은 ‘완전, 건강함, 행복, 번영, 고요, 안전’의 의미로서, 전쟁과 반대되는 상태라기보다는 불안이나 갈등이 없는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평화로운 관계나 평화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평안 그 자체인 완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악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악에 취해 있고, 도구화가 된 인간에게서 기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는 평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 9:6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며 ‘샬롬의 왕’이라고 밝혔습니다. 평화의 기원이자 근원이신 주님께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참 평안을 약속하시며 ‘끼친다’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여기서 ‘끼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φίημι(압히에미)는 ‘쫓아내다, 용서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의 성취,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주님의 사역인 텔레오(τελέω – 끝마치다, 완전히 하다, 빚을 청산하다)와 잇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안을 끼친다’(ερήνη φίημι)는 예수님의 선포 속에는 우리 내면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제거하는 궁극적인 평화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에 맞설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폭로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평안이 아닌,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주님의 참 평안으로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4.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근심하지 말라”(1절)는 주님의 명령으로 시작된 요 14장은 27절에서 “근심하지 말라”는 명령에 이어 “두려워하지도 말라”라는 금지명령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계속해서 비겁하게 굴지 말라”, “더 이상 겁을 먹고 비굴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비겁하게 굴었고, 겁을 먹고 비굴하게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의 본 뜻을 깨닫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해서 여전히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 이후 이 말씀의 본뜻을 깨달았던 제자들은 두렵게 하는 존재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위협하는 유대 당국자들 앞에서도 더이상 비겁하거나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주님의 평안이 그들 속에 단단하게 자리잡아 있었기 때문입니다(행 5:40-42).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또 다른 사도였던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에서 되려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향해 기뻐하라며 다름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빌 4:6-7입니다.

  •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이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권면의 말들입니다. 하지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본인이 두려움 밖에 거하고 있었기에 감옥에서 되려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감옥 밖의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며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이해와 지각을 뛰어넘습니다. 그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왔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 평강이 불확실한 미래와 상실이 상존하는 현실세계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지키신다’는 말씀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을 가리키는 군사용어입니다. 두려움 앞에서 우리 존재가 무기력하게 될 때, 그 두려움을 도구삼아 주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허물어뜨리려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이 있고, 상실이 있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동일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홀로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잡아주고, 챙겨주고, 인도해 주실 뿐 아니라, 세상이 알 수없는 주님의 평강으로 단단하게 붙잡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셔서 끝내 승리하도록 해주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보장이며, 주님의 견고한 약속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절).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안달했습니다. 잃어버릴까 초조했습니다. 상실과 결핍에 대해 두려워 했고, 염려했으며, 안절부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 자체가 두려웠으며, 두려움에 잠식되어 너무나도 무기력한 하나님의 자녀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바라건데, 모든 것을 합력해 끝내 선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잃은 것에 대해, 잃어버릴 것에 대해 염려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옵소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두려움의 전장에서 우리를 단단히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날마다 순간마다 경험하게 하옵소서. 


2019년이 벌써 한 달이 지나고 둘째 달이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달 동안 잃고, 빼앗긴 것들이 많습니다. 나이들어가며 소멸되고, 상실되는 것들이 허다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 속에서도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는 주님의 평강이 온전히 우리를 다스리시길 원합니다. 그 주님의 평강 안에 거하기에 이제 더이상 비겁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주님의 사람으로 당당히 2월 한달도 행군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구정연휴를 만나 가족, 친지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평강이 흘러가고, 녹아나게 하옵소서.


평강을 주시며, 책임져 주셔서 끝내 승리케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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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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