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2.02 움오름 주일 설교 - "유익하다고 2"(요 18:12-14)

2월 1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2~14

12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13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14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설교문

1. 이 쪽과 저 쪽의 사람들


중국 우한 (武漢)에서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중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확산을 막는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관계기관의 책임자들과 의료진들의 노고와 희생이 눈물겹습니다.


지금부터 110여년 전 현대적인 의료진은 말할 것도 없고 시설조차도 미비했던 조선에 32살의 여인의 몸으로 들어와 대한간호사 협회를 세우는 등 우리나라의 의료 보건에 헌신한 전문 간호사 출신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한국식 이름은 서서평, 본명 Shepping((Elisabeth Johanna Shepping)을 음차한 듯한 이름이었습니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성경과 간호학을 가르쳤던 선교사님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습니다.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부엌떼기’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며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현재 한일장신대)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만-4만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 삶을 일깨우는 일에 헌신하다 1934년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선교사님의 나이 54세,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뤄졌습니다.장례식에는 수많은 나환자과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며 애도했습니다. 선교사님의 부음을 듣고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있던 이런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NOT SUCCESS, BUT SERVICE)”


현재 서서평 선교사의 유해는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호남신학교(예장 통합) 옆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영면해 있습니다.


세상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진정으로 따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온 생을 바쳐 마신 분들입니다. 반면, 세상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왕국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온갖 아름다운 이유와 구호를 만들어 추종자를 만들고 끝까지 왕노릇하는 사람들입니다. 유창한 언변으로 거룩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듯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잔과는 관계없는 인간 욕망의 잔일 따름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2.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예수님의 삶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대응을 보노라면 늘 이런 의문이 들곤 했습니다. 이른바 사회의 하층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평생을 성경을 연구해 오고 누구보다도 메시야를 기다렸다던 종교 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요?


어떤 맹점(blind spot)이 그들의 눈을 가렸을까요? 맹점이라는 부분이 다소 익숙치 않을 수 있는데, 쉽게 표현하자면 자동차를 운전할 때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 같은 것입니다.


운전하다 차선변경을 하려고 방향지시등을 넣고 옮기려는 순간 옆 차선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차가 나타나 “빵~”하고 경적을 울리던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서 볼 수 없던 지점에 다른 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사각지대라고 부릅니다. 정신 또는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동차의 사각지대처럼 우리의 정신적인 부분에 이런 맹점(blind spot)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해 종교지도자들에게 어떤 맹점이 존재했길래 메시야를 죽음의 십자가로 내몰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현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맹점이 무엇인지 비춰보려 합니다.



1) 진영 논리


‘진영 논리’란?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념만 옳고, 대립하는 진영의 이념은 그르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진영의 논리는 자신이 속한 단체에 대한 높은 소속감으로 이어집니다. 높은 소속감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그만큼 충성도가 높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충성심은 또 다른 쌍둥이를 대동하곤 합니다. 그 쌍둥이의 이름은 배타성입니다. 나와 우리 아닌 이들에 대한 구분과 차별입니다. 이렇게 충성심과 배타성이 어우러지다 보면 결국 자신들의 무오성과 특권의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활동한 주요 정신 집단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젤럿(열심당)파 등 4개였습니다. 이중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공동구성된 단체가 산헤드린(*Sanhedrin = a sitting together, 둘러앉음, *기원: 모세의 장로 70명 + 의장 1명) 공의회였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산헤드린 공회란? 로마 제국 통치 하의 일종의 지방 자치 협의회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비록 지방 자치 기관을 허용하면서도 그것을 총독의 권한 아래 예속시키기 위하여 자치단체의 수장은 로마가 직접 임명했습니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의장을 임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시절 그렇게 임명된 산헤드린 의장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표적인 두 사람이 안나스와 가야바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수호하고 유대사회를 신앙으로 지킨다는 명분 하에 각가지 현안에 대한 기준을 정했고, 옳고 그름을 판결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절대선으로 여겼던 율법에 대해 그들이 가졌던 해석권은 그들을 절대지위로 견고히 유지시켜 주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또는 단체와 사회 속에서 옳고 그름을 밝히고 판결해 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통칭해서 우리는 판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결하고 고귀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근래들어 더더욱 그 출신 사람들이 예전에 했던 판결의 실수에 대한 태도나 현재 행하고 있는 그들의 언행을 종합해 볼 때, 보통의 가치보다도 한참을 덜떨어진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젊은 때부터 결정권자가 되고, 선과 악을 판결하는 종결자로 존재하다 보니 스스로의 지적능력이나 인격적인 부분 역시 무흠하다는 착각을 해 온 결과는 아닐까요?


안나스나 그의 뒤를 이은 가야바나 모두 출발은 제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20대부터 수행한 사제직은 그들을 일찍부터 노회한 종교 정치꾼으로 만들었습니다. 거기다 로마제국으로 부터 위임받은 자치수반으로서의 역할은 가히 그들을 하나님의 대행자로 군림토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초라한 시골 청년이 곱게 보였을리가 없습니다. 나아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메시야라고 외치며 한 때 일어났다 사라져간 드다와 유다와 같은 류의 자칭 메시야라고 여기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속한 진영에 갇혀 밖을 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2) 전문가라는 의식


무언가를 더 배우거나 앎의 깊이가 더해지면 우리는 스스로를 고수, 또는 전문가라고 믿습니다. 이른바 ‘지식의 흑화현상’입니다. 물론 책을 읽고 공부를 더 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만큼 범위와 영역이 확장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앎은 늘 제한적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절대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또는 앎이 더해 갈수록 겸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산헤드린을 다시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가장 율법에 있어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 7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전문가란? 특정 분야의 일을 줄곧 해 와서 그에 관해 풍부하고 깊이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특정 분야에 있어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맹점이 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니 따로 확인하고 조사하지 않습니다. 쉽게 지금까지의 관성과 관행에 의해 결론내려 버립니다. 요 7:50-52을 함께 찾아 읽어 보시겠습니다.


50절: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절: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니고데모는 요 3장에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공의회원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얼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소위 말해 율법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지도 않고, 또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조사도 해 보지 않고 판결부터 내릴 수 있느냐라고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어디에서요?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그러니까 대다수의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니고데모를 향해 “너도 예수와 같은 갈릴리 출신이냐?”라며 비아냥 거렸다는 겁니다. 왜 이런 행동이 나왔을까요? 자신들이 전문가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이미 지식의 흑화가 되어 있었기에 다른 의견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조사해 보고, 들어보고 할 필요없이 결론부터 내린 겁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렇게 흑화된 전문가들의 난동과 선동에 의해 혼란이 가중되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니고데모의 태도와 행동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요 7:51)



3) 명분


대사제사장 가야바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한 사람이 예수님이었을까요?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온 민족이 살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이 자신이 되면 안됩니까? 왜 나는 죽으면 안되고 다른 사람은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까?


가야바는 ‘민족’이라는 아주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렇게 죽이려는 이가 바로 그들이 그렇게도 대망했다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국은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킨 협잡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명분은 보통 ‘대의명분’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겉으로 제시하는 이유나 구실을 의미합니다. 일을 하기 위한 이유나 구실, 필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매이게 될 때, 명분은 다른 누군가의 눈을 가리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렇게 명분을 중시하는 것은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관리하는 대중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자주 드러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으며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칠 때 앞서 말씀드렸듯이 실제 이유와 욕망을 교묘히 감추는 용도로 오용될 여지가 농후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겠습니다.

마더 테라사가 드렸던 기도가 명분에 오염된 우리를 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누군가를 죽음의 길로 내모는 대신 누군가를 위해 나를 내어놓는 희생의 단조로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했던 사랑의 행위라면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을 구하고 구원받도록 하는 놀라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올해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대신 소화(작은 꽃) 테레사처럼 사랑의 길로 내딛는 시간 되었으면 합니다.



3. 에바다


사실 맹점은 우리 사고의 일부이기에 완전히 없애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동차가 끊임없이 사각지대를 없애려고 보완장비들을 달듯이 우리도 자신의 맹점을 일단 파악하면 이로 인해 왜곡되는 인식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블라인드 스팟: 내가 못 보는 내 사고의 10가지 맹점>이라는 책을 통해 매들린 L. 반 헤케는 보편적인 3가지 맹점만 파악하더라도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첫째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둘째, 전체를 놓치고 부분만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셋째,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겁니다.


막 7:31-37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여느 치유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주님은 환자의 양쪽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셈족어의 일원으로 현재의 시리아 지역에서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사용된 언어.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으며, 히브리어 대신 유대인의 언어가 됨)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어져 말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하셨을까요? ’탄식’이란 마음의 감정으로 한숨을 쉬거나, 신음과 슬픔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 탄식은 듣지 못하기에 말하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깊은 아픔의 표현임을 말합니다.


이어 주님의 탄식은 완악함 때문에 믿지 못하고 표적만을 구하는 세대를 향한 슬픔임을 말합니다. 스스로 보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함을 인식치 못하는 막힌 세대를 향한 탄식이었습니다. 완악이란? 마음이 굳어질대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아무리 은혜의 비가 내려도 굳어진 마음은 그 빗줄기를 담지 못한 채 흘러보내고 맙니다. 그래서 수많은 은혜 앞에 섰음에도 내 것으로 받지 못합니다. 들이박고 반역하고 불순종합니다. 바로 ‘완악함’입니다. 그 완악함은 결국 하나님 행세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안나스와 가야바 길로 이끌고 맙니다.


오늘은 2020년 02월 02일 입니다. 숫자상으로 볼 때 매우 의미있는 날입니다. 2020이 뒤집히면 0202가 됩니다. 우리의 딱딱하고 야무진 고집의 땅덩어리들이 이렇게 뒤집어지는 은혜가 있었으면 합니다.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시고, 광야에 길을 내시며 광야로 방초동산되게 하시는 은총, 뒤집히고 막힌 것이 열리는 에바다의 역사가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사각지대, 사고와 생각의 맹점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보완되어 가는 성숙한 2020년이었으면 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자기 영역에 갇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완고한 사람으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마치 신념으로 착각하여 밀어붙이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쪽만 보는 존재임을, 그리고 막힌 존재임을 늘 기억하며 하늘의 자비와 인도하심을 구하는 겸허한 사람들로 살게 하옵소서. 배움과 앎이 더할수록 우리의 앎이 제한적이고, 한쪽 분야에 한 함을 알아 겸허하게 하시고, 명분으로 우리의 욕망을 가리고 덮는 교활함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옵소서.


또한 너무 편리함만 좇지 말고 적당히 불편해 할 줄도 알아 나의 그 편리함을 위해 다른 누군가 희생당시킴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유익함으로 포장하는 일이 없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런 우리의 몸부림,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는 애씀 위에 주님의 에바다의 역사가 우리 삶에, 우리 인격에, 우리 공동체에 편만히 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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