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26 움오름 주일 설교 - "유익하다고 1"(요 18:12-14)

1월 29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2~14

12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13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14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설교문

1. 활과 현이 서로 만나 노래하듯이


작년 가을에 만났던 마틴 슐레스케의 책 <가문비나무의 노래>는 제게 여느 신앙서적에서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깊고 현실적인 감동과 적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책 80쪽에 보면, 바이올린의 활과 현의 관계를 예로들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의 활과 진동하는 현은 기계적으로 접촉하지 않습니다. 활에 너무 많은 압력이 실리면 긁히는 음이 나고, 압력이 너무 낮으면 음이 날립니다. 활이 현에 너무 가까우면 음이 끊기고, 너무 멀면 힘을 잃습니다. 활과 현은 서로 관계 맺고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하느님의 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일방적이지 않지요. 하느님과 우리는 활과 현처럼 만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칫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또는 우리 중 한쪽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관계라면 경직될 수밖에 없습니다.


슐레스케의 말처럼 하나님의 임재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활과 현이 서로의 무게와 누름과 탄력 등을 서로 느끼며 반응함으로써 음을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의 임재도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집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대표적 예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은 일방적 수용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상호작용 가운데서 나타난 반응이었습니다. 만약 활을 쥔 하나님의 손이 힘으로 주님을 누르셨다면 저토록 아름다운 수용의 음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거칠고 둔탁한 소리 밖에 나지 않았을 겁니다.


현악 연주자가 적당한 무게 내림으로 활을 잡은 채 현의 반응을 느끼며 활을 긋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다가오셨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주님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잔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임재와 사람의 반응이라는 부분의 가장 아름다운 모본으로 자리해 있습니다. 2020년도엔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의 반응으로 이뤄지는 아름다운 음들의 연주를 고대해 봅니다.



2. 이에


오늘 본문은 ‘이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에’는 ‘이와 같은 까닭에’라는 뜻입니다. 어떤 까닭입니까?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검을 꽂으라고 명하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마시는 것이 당연다고 하신 까닭입니다. 그러자 체포조들이 주님을 결박하여 끌고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은 그 체포조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군대, 천부장,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바로 그 체포조입니다. 그런데, 여기엔 앞서 요 18:3에 기록된 체포조에 언급되지 않은 특이한 명칭이 등장합니다. ’천부장’입니다. 천부장은 로마의 군대장교로서 오늘날 연대장(대령)급 되는 직책입니다. 이것 좀 심하지 않습니까? 고작 12명의 제자와 더불어 감람산에 오르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성전경비대와 산해드린 바라새인들의 수하들도 모자라 1천명의 로마군인을 통솔하는 천부장까지 동원되었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주둔군의 총책임자인 총독 빌라도도 모르는 가운데 백부장도 아닌 천부장이 여기에 함께 했습니다.


당시 로마군대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점령군입니다. 우리 역사로 치자면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찬탈했던 일본같은 나라의 군대였습니다. 나라의 적, 민족의 원수와 손을 잡고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얼마만한 돈으로 매수를 했기에 로마군대의 천부장이 동조자가 되었습니까?


이 모습을 보니 몇몇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남한지역까지도 수하에 넣기위해 소련과 중공을 등에 업고 민족상잔을 일으킨 김일성 왕조.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다시 그 김일성 왕조와 손 잡고 휴전선 너머로 총을 쏴 달라고 부탁했던 이들. 하나같이 욕망을 위해 적과 손을 잡고 민족을 배반했던 이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유대사회의 이른바 지도층이라고 했던 정치, 종교의 원로들과 지도자들이 이렇게 매국적이고, 반신앙적인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부분은 이익을 위해 빌라도와 헤롯이 손을 잡았던 눅 23:12의 유사 사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당시 예수님 체포조에 동참한 로마의 천부장은 어쩌면 그날 예루살렘 성의 경비를 맡은 부대의 총책임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야간에 그것도 총독이 승인하지 않은 군대가 성밖으로 이동하고 다시 또 들어온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쿠데타 음모 및 가담으로 정죄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예루살렘 주둔 로마 군부는 왜 움직였을까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이익과 제안을 받았기에 이 엄청난 일에 뛰어던 것일까요?


로마군부까지 가담한 체포조는 예수님을 결박한 상태에서 곧바로 빌라도의 관저를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직행한 곳은 안나스의 집이었습니다. 안나스가 어떤 사람이길래 직책도 권한도 없는 사람의 집으로 향했을까요? 요한은 안나스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크게 2부분으로 덧붙였습니다. 하나는 13절에서 그가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14절에 그의 사위 가야바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함으로써 그를 그려볼 수 있도록 열어두었습니다.


먼저 안나스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부가설명이 필요합니다.


안나스는 AD 6년 - 15년까지 대제사장이었는데,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때는 AD 30년경입니다. 은퇴한지 이미 15년 정도 지난 샘인데, 이 사람 집으로 로마군대의 천부장을 비롯해 유대교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공회의 수하들이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사실은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가 가장 실세였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직은 사독계열의 사람 중에 선택된 종신직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통치당시 그들은 수시로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자신들이 지명한 비사독계(특별히 사두계파)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곤 했습니다.

9년간 대제사장직을 수행했던 안나스는 후임으로 그의 다섯 아들들이 번갈아가며 대제사장이 되도록 한 뒤 수렴청정했습니다. 한 마디로 뒤에서 다 조종을 한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엔 그의 사위를 대제사장이 되도록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안나스는 실세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안나스의 집 뜰로 잡혀 가셨던 겁니다.



4. 유익하다고


사도 요한이 안나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전에 가야바가 발언했던 말을 다시 소환했습니다. 이는 2가지를 알려줍니다.


첫째, 구원의 걸음을 내딛는 예수님의 길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 14절에 기록된 가야바의 말은 원래 발언을 보시면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 요 11:50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사도 요한은 이 발언 이후에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요 11:51-52입니다.


51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절: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정리하자면,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라고 말을 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 예언을 했던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의 예언이란? 일반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맡아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로 가야바가 위로부터 주신 말씀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한 사람의 죽음과 전체의 유익을 따지는 문화에 대한 비판입니다.

: 가야바는 정확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발언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과 다수의 목숨을 산술적으로 계산했습니다.


오늘 예배순서지 <움이 트는 생각>에 보시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 권력서열 2인자라고 불렸던 차지철과 그가 했던 끔찍한 발언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1979년 10월 16일(금) 김영삼 의원의 의원제명이 계기가 되어 부산과 마산에 있는 학생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유신정권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부마항쟁이라고 불리는 시민혁명이었습니다.


이에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사태가 더 악화되면 자신이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호실장 차지철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발언했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이나 죽였는데 기껏 1~2백만명 죽이는 것이 별 문제가 되겠습니까?”


전형적인 “한 사람이 죽어서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사고이고, 화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한 차지철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평소 술과 담배를 일체 안하고 하루 두 차례 꼭 기도를 드리는 철저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매주 수요일 새벽 4시엔 삼각산 비봉 바위 밑에 있는 조그만 기도원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몇 시간씩 꼼짝 않고 기도했을 정도입니다. 집에도 조그만 기도실을 하나 만들어 놓고 십자가 밑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6시, 저녁 6시 두 차례 노모를 모시고 예배에 정성을 쏟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드린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과연 누구를 위해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기도했을까요? 눅 15장의 예수님의 비유 속엔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둔 채 다급하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전체를 위해 하나를 희생시키는 저급한 문화’에 대한 거부입니다. 하나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이 전체에 대한 사랑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단체, 한 공동체의 수준은 그 단체의 지도자를, 또는 핵심 멤버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되려 그 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 가장 힘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그 공동체의 수준은 결정되고,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 심청전 역시 효녀 심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이면엔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만들어내는 유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장하는 시대와 문화에 대한 고발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어떤 이들은 힘없고 가진 것이 없어 누군가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인당수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위험의 외주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8:14)


언제쯤이면 우리는 나의 이익, 나의 욕망을 위해 다른 이를 죽음의 길로 내몰고, 희생의 도구로 삼는 길에서 내려올 수 있을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거룩한 뜻을 내세우며 한 사람을 희생제물 삼았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길로 행치 않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모든 결정의 선제조건이 ‘이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평생 이익을 좇아 살다가 이익 때문에 멸망했던 무수한 사람들처럼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땅에서 비록 짧은 33년의 삶을 인간으로 사셨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사랑이 기준이요, 삶의 방식이었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하옵소서. 사랑하게 하옵소서.


가장 힘있고 큰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그 공동체의 수준이라 하셨는데, 우리 가정, 우리 교회의 수준이 주님 보시기에 흡족한 수준에 이르는 2020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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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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