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20 움오름 주일 설교 - "또 다른 보혜사"(요 14:15-24)

2019년 3월 1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4:15-24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설교문

*설교에 들어가기 전: 오늘 나누는 말씀 속에는 질문들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 질문 이후 답을 찾아가는 형식이 많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주중 어느 새벽날, 문득 ‘설교자의 눈으로 세상(성경 포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함께 나누는 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보라’는 말씀에 자극받았기 때문입니다.



1. 사랑을 다해 사랑했노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질문 1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DO와 DO NOT의 종교가 아니라, TO BE 또는 BEING의 종교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도 어떻게 자꾸 행함을 강조합니까?’


네, 맞습니다. 기독교는 ‘하라, 하지마라’는 윤리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하나님의 형상 회복)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그 신분과 지위에 맞게 행하듯,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누가 해라, 하지 마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겁니다.


질문 2

이런 맥락에서 주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강조점이 ‘나를 사랑하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이, 그런 존재가 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모두 행할 수 있게 됩니까?’ 


사랑하고 계신 분들 대답 한번 해 보십시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습니까? 작년 12월 21일 늦은 밤에 한 형제로부터 이런 다급한 메시지가 왔습니다(본인의 허락을 받아 나눕니다).


“목사님 기도좀 해주세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죽을것 같아요… 왜… 마지막 호스피스에 있을때 만이라도 잘해주지 못했을까요?  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워요. 사람도 아닌것 같아요. 마음이 너무 아파요…”


작년 3월 고난주간에 사랑하는 자매를 먼저 보낸 형제는 누가보더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부모도 하지 못하는 말기암 여자친구의 간병을 마지막까지 했습니다. 언젠가 새벽 3시가 좀 넘은 시간에 호스피스 병원에 들렀을 때, 병실 바닥에 쪼그린 채 잠들어 있던 형제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을 정도였습니다. 형제는 그렇게 자매를 그의 힘을 다해 간호했고, 병 수발했습니다. 그런데도 밤이 깊어가고, 먼저 보낸 상실의 아픔이 그를 덮을 때, 너무 미안하고,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며 울었습니다. 더 사랑하지 못해서, 더 아껴주지 못해서 후회했습니다.


멀리서 울고 있는 그 형제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위로는 별게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 중 그 어떤 이가 진정 사랑을 다해 사랑했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용량만큼 사랑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기 암으로 투병하는 사람을 옆에서 돌본다는 것은 한 인간이 허물어져가는 그 아픈 과정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점점 소멸되어 가는 그 기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그의 존재 역시 안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소멸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도 형제는 그 아픔의 자리에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함께 그 자리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참으로 애쓴 것입니다. 그러니 아파하지 말고, 미안해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질문 3

그런데, 우리가 온 맘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가진 사랑의 수준에서 사랑하는 겁니다. 온전하고 완벽한 사랑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 앞에서도 작아지고, 아파하며, 후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질문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이가 되더라도 다 지켜 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계명을 못 지킬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또 다른 보혜사

이에 대해 주님은 본문 16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주님의 해결방법은 ‘또 다른 보혜사’(λλον παράκλητον)였습니다.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란? 곁에서 돕는 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씀 속에는 예수님 또한 곁에서 돕는 분, 보혜사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던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희노애락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상실의 아픔과 결핍의 고통을 겪으셨고, 인간의 최대 두려움인 죽음까지도 몸소 맞으시는 것을 통해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보혜사로 함께 하셨습니다.


질문 4

그 보혜사께서 때가 되어 하나님께로 가시기 전 남아 있을 당신의 사람들을 위해 친히 간구하신 것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또 다른 보혜사’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영원토록 우리 곁에서 무엇을 도우신다는 겁니까? 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속에 거하신 답니다. … 오케이! 그래서 무엇을 도우신다는 겁니까? 요 14:26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를 날마다 진리로 가르치실 뿐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살아가도록 견인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질문 5

주님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 계명을 다 지킨다는 것은 어렵고 버겁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도우시고, 이끄셔서 그 말씀들을 지켜가게 하신다는 것이 감사하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다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이전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 이전 구약성경 시대의 성령님의 역할과 예수님 이후의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은 어떻게 다른 겁니까? 



3. 같은듯 다른 성령님

성령님은 신약시대에 처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천지창조전부터 수면 위로 운행하시며 창조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도 생기가 되어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과 실낙원 이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연합하여 ‘네피림’을 낳으면서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오래토록) 사람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창 6:3)


이후 인류의 역사는 노아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겪으며 소멸과 번성을 거쳤습니다. 번성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육체의 번성에 한하는 슬픈 시간이었습니다. 강하고 위대한 장부로 살며 세상을 지배했지만, 하나님의 영이 없는 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영이 요셉의 시대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하며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창 41:1-39).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신을 그에게 부어 주시어 성막 건축의 사역을 감당케 하셨습니다(출 31:1-5).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는 가나안 초기 사사들에게나 선지자들에게 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첫번째 사사 옷니엘은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사사가 되었습니다(삿 3:10).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사자를 마치 염소 새끼를 다루듯이 했습니다(삿 14:6).  그리고 엘리사나 다니엘,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은 성령님을 힘입어 권능을 행하거나 예언을 했습니다(왕하 2:12-15, 단 4:8, 겔 11:24). 심지어 사울왕과 다윗왕을 비롯한 왕들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예언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내주(in whom)나 역사는 신약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성령님과 신약시대의 성령님은 어떻게 다릅니까? 


첫째, 구약 시대의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해 사용하시는 몇몇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했습니다. 보편적인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엔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시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었습니다. 


둘째,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맡은 사역을 다했거나 범죄했을 때 성령님께서 그를 떠나셨습니다(삿16:20, 시51:11).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성령님께서 믿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거하십니다(요14:16). 여기서 ‘거하신다’는 원어의 뜻은 ‘텐트를 치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 시기 하나님의 성막(텐트)을 쳤을 때, 하나님의 영이 성막 가운데 임재하여 거하셨듯이, 사람을 성전 삼아 그렇게 내주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신약시대의 성령님은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삼손 혼자서 감당했습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솔로몬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지혜로운 소문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까지 전해져 시바의 여왕이 그 지혜를 듣고자 예루살렘까지 방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습니까? 사람이 안바뀌었습니다. 그에게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났지만, 품성이 바뀌지 않고, 인격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성령님은 사람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만지십니다.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 결과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 가도록 도우십니다. 이를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표현대로 바꾸면, ‘거듭난다’는 말씀이 됩니다. 요 3:5-8입니다.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거듭 난다는 말은 사람의 영이 성령님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창조 때에 사람을 생령(Living Sprit)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성령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양육하셔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에 임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이요, 역사입니다.



4.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

몇차례 말씀드렸듯이, 초등학교 때부터 저는 어머니를 따라 신앙부흥회를 다녔습니다. 현재 우리가 속한 장로교 신앙문화에서는 성경(말씀)을 강조하지만, 제가 성장한 성결교 문화 속에서는 성령님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은 하나같이 ‘능력’으로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베풀고, 방언을 하고, 은사를 경험하는 것이 성령의 사람이고, 신령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되려고, 신령한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 매달렸습니다. 악착같이 성령의 사람이 되려고 연초면 1월 1일부터 2박 3일씩 금식기도회에 참석하고, 신앙부흥회에 새벽부터 밤까지 꼬박꼬박 참석했습니다. 부흥강사의 눈에 잘 띄어 축복기도받으려고 늘 맨 앞줄에 앉아 “아멘!,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미친 중 2라고 하는 사춘기에 성령체험하고 방언을 하고 하루 새벽기도 2번, 그리고 1주일에 1번 철야기도를 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초기에도 이 습관이 유지되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밤 10시 기숙사 점호를 받고 난 뒤 산에 올라가 매일 밤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종교성은 풍성해지고, 사람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저의 삶과 인격엔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러한 것이 저 뿐이 아니었습니다. 고향교회에는 매일같이 이불을 들고와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던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기도하시면 얼마나 뜨거운지 옆에 있으면 탈 정도였습니다(과장해서…). 그런데, 지금도 잊을만 하면 교회에 분란을 일으킵니다. 같이 신앙생활하는 분들에게 마음의 큰 상처를 줍니다. 인격이 바뀌지 않고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4명의 아들 딸들도 신앙을 떠나고, 며느리는 신천지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기도 많이 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살아가는데 삶은 그와는 동떨어지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를 안고 살아가면서, 또 그런 분들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의 일’(하나님 나라)을 위해서 일 때입니다. 나를 과사하거나 내가 신령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임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임하시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없이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외적 역사입니다(이 부분은 다음주일 오후에 출애굽기 강의시간에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과 나눔,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나타나는 내적 역사는 무엇일까요? 마음의 성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 성령의 전으로 들어가 번제단에 어린양의 피를 뿌리며 사죄의 은총을 받습니다. 물두멍에서 물로 내 심령을 적시며 오늘도 성부 하나님을 위해 내 인생의 최고의 것을 드리기로 다짐합니다. 누룩없는 성자 예수님을 양식삼아 성결된 삶을 구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듯이 성령님의 조명아래 삶의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만납니다. 누립니다. 그 내적 인도하심, 그 역사 안에서 사람이 바뀝니다.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변화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점점 맺어갑니다.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2019년 새해들어 제가 새롭게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일기를 쓰고 또 저녁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녁일기가 하루를 되돌아 보며 자랑스러웠던 일이나 아쉬운 일들을 적는 것이라면, 아침일기는 눈을 뜨고 의식을 차려가는 순간 떠오르는 감사와 감사한 사람을 적습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그 일이 무엇인지를 적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주시는 말씀의 조명 아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영으로 오늘 하루도 붙드시고, 힘주시고, 매만져 주시길 구합니다.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무의미함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내재하신 성령님께 조금이라 더 민감하려고, 조금이라도 더 성령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려는 그 몸부림을 하나님께서 외면치 않으시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진리로 만져주시고, 다듬어 주셔서 인격이 바뀌고, 사람이 변화되도록 분명 그렇게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또 다른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저 좀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돕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닙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 까지 도달하고 자라도록 우리를 독려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 마음을 만지십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도 우리를 감동케 하셔서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이분께 우리 마음을 맡기지 않으시렵니까? 만지시는(touch) 그분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우리의 하루를 드리지 않으시렵니까? 그때 우리는 지난 해와는 분명 다른 2019년 새해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대면케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주님의 이 말씀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말씀임을 확인케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오늘도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의 등불되시며, 우리 생의 길에 빛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장막을 치시고 거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실 성전으로 세워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다듬어 지고, 성결케 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진심으로, 온맘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즐거이 지켜 행하는 사람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 생이 사용될 뿐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의 인격과 삶이 성령님의 열매로 채워지는 멋진 삶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습이 좀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날마다 근접해 가는 행복한 믿음의 인생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커버 사진: 스위스 루체른 카펠교(Luzern Kapellbrüc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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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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