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19 움오름 주일 설교 - "아버지께서 주신 잔"(요 18:7-11)

1월 22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7~11

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0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11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설교문

1. 황금실이 달린 공


오늘 예배 순서지 <움이 트는 생각>에 적혀있는 글 ‘6만가지 생각’의 출처는 로빈 샤르마(Robin Sharma)의 「나를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같은 책 안에 다음과 같은 동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피터라는 아이가 혼자 숲속에서 놀다 황금실이 달린 공을 들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100살도 더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피터에게 공을 선물로 주면서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건 네 인생의 실이란다. 이 실을 조금만 잡아당겨도 몇 시간이 지나간단다. 그리고 좀더 세게 잡아 당기면 며칠이 지나가고, 온 힘을 다해 당기면 몇 십 년이 지나갈 수도 있단다.”


며칠 뒤 피터는 교실 안에서 불현듯 자신의 새로운 장난감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황금실을 조금 잡아당기자 어느새 집에 돌아와 정원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피터는 실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아주 흥미진지한 십대 청소년이 되고 싶었던 그는 다시 공을 꺼내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엘리즈라는 예쁜 여자친구를 둔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피터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는 다시 실을 아주 세게 잡아당겼습니다. 수많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그는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즈는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고, 그들 사이에는 많은 자녀들이 태어나 있었습니다. 변화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덧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는 늙고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피터는 현실 속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사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던 피터는 다시 한번 마술 실을 잡아당기고는 자신에게 나타날 변화를 기다렸습니다. 피터는 아흔 살이 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머리는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고, 젊고 아름다웠던 아내는 벌써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자식은 모두 장성하여 그의 곁을 떠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초를 가꾼 적도 없었고, 좋은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삶을 대충대충 서둘러 지나치면서 그 속의 온갖 좋은 것을 음미하는 시간을 단 한 번도 갖지 않았던 겁니다. 그때 황금실을 주었던 할머니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어떠냐? 내 특별한 선물을 갖고 재미있게 놀았니?”


피터는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이제는 그걸 증오하게 됐어요. 그것은 내게 즐길 기회도 주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인생을 지나가게 했어요. 그 속에는 슬픈 시절뿐만 아니라, 기쁜 시절도 들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했죠. 그래서 지금은 온통 공허할 뿐입니다. 나는 삶이 주는 선물을 놓쳐 버렸던 거예요.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동화의 마지막에 피터는 다시 초등학생 아이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일상의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기며 인생을 다시 시작합니다. 피터의 이런 모습은 삶의 현재를 살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같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우리는 그 순간들이 후다닥 지나가기를 구합니다. 얼른 그 시절이 지나고 아름답고 윤기나는 때가 오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속에 담겨진 의미를 채굴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우리 삶을 사금채취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사금(砂金)은 금을 포함하고 있는 바위가 풍화작용을 통해 잘게 부서진 후 강가나 해변에 퇴적한 것입니다. 보통 순도가 80% 이상으로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지만, 채취가 여간 고되지 않습니다.


사금을 함유한 흙을 쟁반에 담아 물 속에서 흔들어 토사를 흘려보냅니다. 소량이 아닌, 아주 미량의 금을 얻기 위해 수없이 이런 작업을 반복해야 합니다. 별로 해낸 것도 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반복된,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그 일들 속에서 소중한 삶의 빛나는 부분들을 채취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9절을 보면, 생의 마지막 그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 수많은 흙덩어리 속에서 빛나는 아주 작은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고단하게 반복하는 작업자의 섬세한 손길처럼 당신의 양때를 보호하시려는 주님을 봅니다. 고단할 뿐 아니라, 위기에 처한 삶이 주는 선물조차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삶을 통해서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삶을 사신 주님을 그 속에서 만납니다.



2. 칼을 칼집에 꽂으라


체포조를 향해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8절)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땅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 중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이 제일 먼저 예수님의 곁으로 다가 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순식간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단번에 말고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습니다. 하지만, 다행인듯 칼은 살짝 빗나가 말고의 오른편 귀만 베었습니다. “악”이라는 말고의 외마디 신음과 함께 이내 피는 사방으로 티며 비린내를 풍겼습니다.


“나만 데려가고, 이 사람들은 가도록 용납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압송과정이 순조로울 줄 알았던 체포조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저편에서 무장한 줄은 미처 몰랐는데, 이제 한판 전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그때 허리를 굽혀 말고의 떨어진 귀를 주워 올리신 주님은 귀에 뭍은 이물질들을 털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귀를 감싸쥐고 있는 말고의 손을 잡으시며 그의 귀를 원래처럼 되돌려 주셨습니다. 곧이어 주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 이유는 2가지입니다.


첫째,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주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명하셨다고 요한이 간단하게 전하는데 반해, 마 26:52은 다음과 같이 보다 상세하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는 이 말씀을 서양사회는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He who lives by the sword dies by the sword)라는 말로 속담화 시켰습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력을 사적이익을 위해 사용하다간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파멸의 길로 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무수한 역사 속 이야기들이 증거해 주기에 굳이 실례를 들 필요는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한 드라마(스토브리그)의 대사로 옮기자면,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눅 22:51에 보면, 주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며 베드로를 향해 “이것까지 참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기분대로, 감정따라 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분은 온갖 것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 탓에 통제하고 예측할 수 없는 가장 변덕스러운 요물로 변신을 거듭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태도를 기분에 휘둘리게 방치할 때 우리는 결국 기분이라는 괴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영미권에서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 중에 “How are you feeling today?”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문진할 때도 사용하지만, 대부분 오늘 기분이 어떤지를 물을 때 사용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분 상태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기분에 따라 일의 결과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좋은 태도로 일하고, 기분이 나쁘면 나쁜 태도로 일한다면 그 사람과 일하고 싶겠습니까? 우리는 기분에 따라 태도를 바꾸지 말고 늘 좋은 태도를 선택해 가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감정이 상하더라도 칼을 칼집에 넣은 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분이 좋아야 삶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태도가 좋아야 삶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기분을 좋게 바꾸기 보다는 태도를 좋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 두번째 이유는 그 싸움이 칼을 휘두르며 싸울 육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구원을 위한 영적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 마 26:53-54은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다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명하시며 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주님은 베드로의 폭력을 가로막으시며 무리들에게 붙들려 가셨습니다. 주님은 열두 군단(로마의 1개 군단 병력이 6천명, 12군단이면 72,000명)이나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막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 능력과 권세를 사용해 체포조를 제압할 만한 힘과 권세가 있으셨지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되려 가진 힘과 능력을 사용하기보다는 무력하게 보이는 체포의 길로 가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이루게 될 영적싸움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면 전략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며 욕망을 부추깁니다.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궁극적 선이나 국가의 장래를 위하지 않습니다. 당장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에 대해 싸워야 하고, 조직의 생존을 위해 선택적 정의라 하더라도 모든 권한을 동원하는 것을 주저치 않습니다.


주님은 이런 시대를 향해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집총을 거부하고 군대에 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눅 22:36에 보시면,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 안에는 체포조를 향해 내달려가려는 가룟유다의 마음을 되돌리시려는 뜻이 있기는 하지만, 유대인의 이불과도 같은 재산목록 1호인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서 위급한 때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하지만, 정작 위급한 상황이 이르자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치를 발합니다. 칼집에 꽂혀 있을 때 정의와 질서와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 됩니다. 폭력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거리를 두게 합니다. 하지만, 칼이 칼집에서 뽑히는 순간 흉기가 됩니다. 그래서 칼집에서 뽑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칼을 뽑아 한 번 피를 묻힌 사람은 항상 칼을 뽑아 들고 있어야 합니다. 피 묻은 칼을 칼집에 꽂지 못하고 불안에 떨며 그 칼을 잡고 사는 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오늘도 우리는 불안한 미래 앞에서 혹이나 칼을 뽑아들고 날을 세운 채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 하십니다.



3. 아버지께서 주신 잔


순간적인 감정에 잡혀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진정시킨 주님은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8:11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당신이 감당하셔야 할 일, 걸어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을 ‘잔’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말씀 전의 상황에 대해 별로 언급이 없지만, 공관복음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주님의 기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힙겹고 버거웠으면 주님도 무려 3번이나 기도하실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당신을 위해 1시간이라도 제발 깨어서 중보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라는 지명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올리브유를 짜 내는 듯한 짓눌림과 아픔을 처절히 느끼면서도 끝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 속엔 하나님의 잔을 대할 때 가져야 할 두 가지 부사를 만납니다.


첫째는, ‘기꺼이’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이 잔을 기꺼이 마셨습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기꺼이’ 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받으시기 까지 주님은 씨름하셨습니다. 몸부림치셨습니다. 피하고 싶어 3번이나 아뢰셨습니다. 주님의 ‘기꺼이’는 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 관성과 저항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변함없음을 아신 후 수용하셨습니다. 기꺼이 그 뜻을 따르셨습니다.


둘째, ‘홀로’입니다.

: 주님께 주시는 아버지의 잔은 오롯이 주님께서 홀로 감당하셔야 할 주님의 잔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는 어린양 되신 주님이 감내하셔야 했던 주님의 잔이었습니다.


20대 초반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 중에 ‘길’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 속에 홀로 소명의 길을 걸어가셨던 주님의 길과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도 하룻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해

멀고도 험한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해

나 혼자 가야해

아아아

갈래 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갈래 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그런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는 주님의 말씀 속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주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 신뢰가 있기에 비록 두려워도, 원망스러워도 기꺼이, 그리고 홀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며 나아가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보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끝내 거부하셨다면 인류는, 그리고 우리 신앙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결과는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에, 우리 각자에게 주신 아버지의 잔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마지막으로 저의 부끄러운 경험 하나를 나누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작년 연말 가까이 지내는 5살 위의 동기 형이 본인이 속한 족구모임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2012년도까지 거의 매주 한번씩 족구와 축구를 하며 보냈던 저로서는 상당히 반가왔습니다. 비록 7년여 동안 족구할 기회가 없었지만, 한때 저는 왼발, 오른발을 다 사용할 뿐 아니라, 오버 해드킥으로 득점을 올리는 전천후 공격수였기에 사뭇 기대가 되었습니다.


충만한 자신감을 갖고 드디어 시합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했던 난리가 났습니다. 공을 받기 위해 다리를 올리다 넘어졌습니다. 뒷걸음질 치다 걸려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었습니다. 도저히 그 모습이 한때 ‘족구의 신’이라고 불리던 저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창피한 것은 함께 게임을 했던 분들이 대부분이 저보다도 다 연상일 뿐 아니라, 많게는 10살도 더 많은 분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근육은 운동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감각이 무뎌지고 급기야는 무감각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한때 아무리 날고 뛰었다 하더라도 무능한 고문관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절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아무리 잘 알아듣고 순종했다고 해도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근육을 단련하지 않으면, 순종의 훈련을 하지 않으면, 그래서 감각이 무디어 있으면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되려 평소 자주 해서 습관이 되고 날이 서 있는 칼을 뽑아 휘두를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감당하며 사시렵니까? ‘기꺼이, 홀로’라도 그 길을 걸어가시렵니까? 그렇다면, 2020년 우리 영혼의 근육을 어떻게 키우시렵니까? 어떻게 ‘지금, 이곳을’ 살아내시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고 해서 그 순간들이 후다닥 지나가기를 구하지는 않게 하옵소서. 그러다 오늘 속에 담겨진 의미를 채굴하지 못한 채, 그 기쁨을 향유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 소비자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분이 우리의 태도가 되지 않게 하셔서 기분이라는 괴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옵소서.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감정이 상하더라도 칼을 칼집에 넣은 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기분을 좋게 바꾸기 보다는 태도를 좋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길임을 우리로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생의 구비구비마다 육적 싸움을 넘어 영적 전투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함으로써 우리의 이익이나 호불호에 반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선택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올리브유를 짜 내는 듯한 짓눌림과 아픔을 처절히 느끼면서도 끝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기꺼이’, 그리고 ‘홀로’라도 우리에게 주신 잔을 감당하기 위해 영적 근육, 기도의 근육을 키워가고 단련해 가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으로 인해 구원의 역사가 새로이 만들어진 것처럼 2020년엔 우리 믿음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는 기쁨과 감격의 한 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윤성천집사 봉헌기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찾으며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수도 없이 맹세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잔을 기꺼이 받을 각오는 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힘든 순간이 다가오기만 하면 피하려 하고 숨으려 합니다.

주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오면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던 제 모습을 돌아봅니다.


피하고 싶은 현실과 마주했을때 기도하며 끝내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주님을 보며 우리 삶의 방향도 다시 세워 봅니다.


저의 삶의 목적은 그저 부지런히 살면서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것에 있지 않을 수 있음을 압니다. 주님의 계획은 제가 계획해 본 적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쉽게 알기 어렵지만 주님의 뜻을 끝까지 찾으려고 노력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지체가 될 수 있도록 성령하나님이 도와주시옵소서.

순간순간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찾는 태도가 몸에 베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움오름이 나아가는 모든 길에 우리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앞서게 하시고 결국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정성스럽게 하나님께 올립니다. 올리는 마음을 축복하여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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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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