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13 움오름 주일 설교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요 14:15-24)

2019년 2월 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4:15-24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설교문


1. 엔트로피의 법칙

뉴질랜드에서 동쪽 해상으로 4,000km 떨어진 남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 한 점과 같은 외딴 섬이 있습니다. 핏케언 섬(Pitcairn Islands)으로 불리는 이곳은 1829년 영국이 자국 영토로 선언하면서 영국의 령이 되었습니다. 현재 50여명이 살고있는 이 섬은 슬픈 역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1790년, 바운티호(Bounty)라는 배에서 9명의 선원이 선상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1984년 멜 깁슨과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반란자들의 운명은 베일에 가려져있습니다


그때 바운티호 반란을 일으켰던 선원들이 도달한 곳이 핏케언 섬이었습니다. 당시 이 섬에는 원주민 27명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굴러들어온 선원들이 술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이 섬은 방탕과 악으로 급속히 오염되어 갔습니다. 살인과 폭행이 이어졌습니다.


반란이 있은지 18년이 지난 1808년 어느날이었습니다. 그곳을 지나던 미국의 포경선 토파스호에 의해 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때 남자는 단 한 명 백인 존 아담스(John Adams) 뿐이었고, 원주민 여인 9명과 혼혈아로 태어난 아이 23명이 전부였습니다. 남은 사람들의 숫자와 구성으로 볼 때, 그들 사이에 어떤 참혹한 살육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해오는 한 이야기는 토파스호에 의해 발견될 당시 핏케언 섬은 참극의 장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술과 범죄가 없고, 게으름이 없던 번영된 공동사회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변화의 원인이 반란에 참여했던 한 선원이 바운티호에 실려있던 헌 궤짝에서 성경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한 것 덕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게 된 그 선원이 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를 시작함으로  도래한 평화요, 변화였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은혜로 받고, 감동을 간직하고 싶지만, 웬지 누군가에 의해 살짝 각색되거나 ‘은혜로운 소스’가 가미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위키피디아를 비롯해 각종 관련 자료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은혜로운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는 관련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1832년 선교사 조슈아 힐 (Joshua Hill )이 섬에 와서 1833년 3월까지 금주운동을 펼쳤으며, 1886년 이후 제 칠일 안식교인 존 테이(John Tay)의 선교활동에 의해 섬 주민들의 대다수는 세례를 받고 안식교인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9년에 드러난 핏케언 섬에서 일어났던 집단 성범죄 사건은 그들이 과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1999년에 핏케언 섬에 연수차 와 있던 한 영국 여성 경찰관이 현지 여성에게서 "이 섬에서 14살 아래 소녀들과 대부분의 성인 남성 사이에 성관계가 벌어지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에 따라 경찰관이 이 사실을 뉴질랜드에 있는 핏케언 총독에게 알려 수사가 개시되었습니다. 


수사 결과 이 진술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섬의 여자아이들과 성인 남자 사이의 성행위는 핏케언 섬을 통치하는 영국 법률로는 분명 큰 위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섬의 남성들은 이를 "핏케언 섬의 풍습"이라고 주장하며, 영국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2004년 9월 30일, 섬의 수장인 스티브 크리스천을 포함한 7명의 핏케언 섬 남성 주민이 총 55건의 성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판결받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은혜로웠던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후 세례를 받고 안식교인이 되었던 그들이 200여년이 지난 후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많은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닌데도 왜 이처럼 부끄러움도 상실한 채, ‘섬의 고유한 풍습’이라는 이름으로 약한  어린 사람들을 억압하는 부도덕한 땅으로 전락했을까요? 


이는 인간의 삶에도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엔트로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물질의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설명하개념인 ‘엔트로피’는 '무질서도' 또는 '무질서한 정도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성분을 가진 물질이라 하더라도 상태에 따라 무질서도는 같지 않습니다. 고체보다는 액체, 그보다는 기체 상태일 때의 무질서도가 더 큽니다.


물질의 변화는 대부분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고체 상태의 아이스크림을 실온에 놓아두면 저절로 녹는 현상이나 물에 설탕을 넣고 저어주지 않아도 저절로 녹아들어 가는 현상은 모두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의 예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주위에서 어떠한 도움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자발적 반응입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게 됩니다.


이렇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의 변화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역반응은 비자발적 변화이므로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 내면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두면 죄성의 엔트로피가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소위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게으름, 나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쌓이고 증가하는 것들입니다. 


반면, 선하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은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생기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역행하는 비자발적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019년 새해를 맞이하여 결심한 선한 것들을 세워가고 증가시켜 가기 위해서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 가운데서 그것을 생각해 보며 우리가 지향하고 저항하고 추구할 것들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2. 믿음과 삶이 박리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 계명을 지키는 것(행함)’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문제는 곧 믿음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주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이 되고, 다시 그 질문은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주님을 바르게 믿으려 하는 사람치고, 주님의 말씀을 안지키려고 작정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롯한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말씀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지키며,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인간본성의 엔트로피 법칙을 역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입학한 학생치고 좋은 학점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이는 좋은 학점을 받는데, 어떤 이는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학기 제가 강의한 ‘현대인과 성서’를 수강한 학생수가 140명이었습니다. 그중 20%가 A+와 A학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0여명의 학생이 F학점을 받았습니다. 


필수학점이지만, 종교과목의 특성을 고려하여 웬만하면 점수를 줘서 pass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학점을 받아 탈락하는 학생들은 왜 그럴까요? 학습능력이 떨어져서 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결석을 너무 많이 하거나, 시험을 보지 않거나, 아예 과제 자체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혹이나 위와 같이 했더라도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시도한 학생에게 탈락점수가 주어지는 경우는 지금껏 한번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학교생활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살면 자연스럽게 받는 것이 F학점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격하게 표현해 보자면, F-D-C-B-A 순으로 올라가는 학점은 학생이 얼마나 인간본성을 거슬렀느냐에 따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또 어떻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더 사랑해 집니까? 더 원숙하고, 성숙하게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을 자연스레 따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결국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이유도 이해가 됩니다. 주님을 끝까지, 지속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 속의 자연스러운 성향과 본성을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인 이런 법칙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15절에 이어 21절에서 주님을 사랑할 것(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것)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이 왜 이렇게 사랑(믿음) = 행함이라고 강조하시며, 우리 삶의  엔트로피의 법칙을 역행하기를 요구하십니까? 


잠시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때를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사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6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마태, 누가복음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맨 마지막으로, 대략 90년대 중반에 기록되었습니다. 최초의 복음서를 비롯한 여타 복음서들과 30여년의 시차를 두고 기록된 것입니다. 기록될 당시 초기 크리스천들과 교회의 상황들이 어떠했을까요?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기록된  요한복음이 강조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요한복음이 2번, 3번에 걸쳐 ‘계명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겠습니까? 그렇게 안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라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계명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믿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임을 반복해서 강조했던 겁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서를 통해서도 반복해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요일 2:3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5:3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이 1: 6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기독교 신앙의 모본이라고 일컬어졌던 초대교회 역시 60여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말씀과는 박리된 삶을 살았던 겁니다. 믿음과 삶이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아흔의 노사도가 거듭거듭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 계명을 지키라고 했던 겁니다. 그 삶이 진정한 믿음의 삶이요, 주님을 참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은혜를 넘어서

지금껏 사요 요한의 시대 크리스천의 믿음과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1900여년이 지난 우리의 시대,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중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어쩌면 열역학 2법칙인 ‘무질서’에 철저하게 순응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리 모습의 실태와 심각성을 인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년 제 초등학교 옆짝의 딸 이야기를 나눔자리에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전교에서 밑바닥에 놀며 피자집 알바를 하던 고등학생이 갑자기 자신의 생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손님으로 왔던 한 아주머니의 갑질과 무시를 겪으며, ‘아, 내가 이렇게 살다간 평생 저런 사람의 무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가겠구나! 그렇게 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부하자!’ 


그래서 그 아이가 공부를 했습니다. 그냥 한 것이라,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전교에서 자기 밑에 한명 두고 있던 그 아이가 그렇게 무질서를 인식하고, 기존의 본성을 거스르는 고된 시간을 보낸 결과 수능성적이 구미시 전체 학생 중 이 손가락 안에 꼽혀서 대학을 갔습니다.


한번 진지하게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삶을 되돌아 보십시오. 과연 지금까지 하던대로 2019년을 그대로 살아가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겠습니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무질서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는 주님의 음성에 이제는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월 27일 주일, 우리는 2017년 여름수련회때 공부했던 출애굽기를 복습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는 신앙의 시작과 과정을 보여주는 지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출애굽기는 크게 4부분(1-11장, 12-18장, 19-24장, 25-40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 - 11장은 은혜의 시간입니다. 사람이 하는 게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을 계획하셔서 모세라는 한 사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부모님에 의해서든, 주변 사람에 의해서든, 아니면 아픔과 슬픔 가운데서건 간에 그분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넘어서게 해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이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좋은 것 같이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단계 12-18장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나를 살려주시는 그 은혜 앞에서 과거의 나를 죽이는 세례로 반응해야 합니다. 결핍과 상실의 광야 가운데서 불평과 원망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무질서의 나를 내려놓으며 자기부인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이는 과거 애굽의 삶을 동경하고 그곳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가 나이가 되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갑니다. 잘 모르고, 때로 생떼(unreasonable persistence)를 부리더라도 선생님들이 “오냐! 오냐!”하며 다 챙겨줍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갑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때 하던 것처럼 똑같이 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봐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집스럽던 나를 내려놓는 것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그것이 힘들다고 아이가 유치원으로 다시 되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끝까지 유치원에만 다니겠다고 한다면 “그래! 그렇게 해라!”라고 할 부모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경험했으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 내 생각, 내 고집, 내 방식을 내려놓고, 은혜에 반응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하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가는 겁니다.


우리 시대,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교회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말로 하는 고백은 이미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몇 번이나 드리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은, 행위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과 너무나도 괴리되었고, 박리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2천여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살다 갔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진정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그래서 본성에 저항하며 주님의 말씀을 온 힘을 다해 살아냈던 교회와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하지만, 그 소수에 의해 시대와 사회는 늘 무질서의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며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이 어두움, 이 무질서와 혼돈을 해결하고 새롭게 할 책임과 의무는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새해가 되었다고 우리 각자는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경영하고 자신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에게 규칙적인 일과를 부여하며, 해야 할 일들 앞에 세우며 성실한 공장장 같은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우리가 원래 반듯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어둠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소지가 다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그냥 두기만 해도 무질서 하고, 나태해 지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지배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리를 살아가며, 말씀을 실행하는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서 갈 수 있겠습니까? 거스르게 해 주십시오. 무질서한 우리 본성을. 저항하게 해 주십시오. 죄성과 타성에 젖은 우리 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게, 아니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십시오. 신앙의 연수와 직분으로 이야기하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열매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속의 무질서 안에 생명의 질서를 부여할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을 오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커버 사진: 시응성 Château de Chil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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