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12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요 18:1-9)

1월 20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9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3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6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설교문

1. 만남과 헤어짐


‘인생’이라고 일컫는 사람의 삶은 혼자서 살아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한자 ‘人’(사람 인)의 생성과정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삶, 바로 인생입니다.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통해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존재와의 만남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만남의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년-1965년)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만남을 통해 내가 누군지를 알아가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여러 면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남을 통해 “나는 네가 되며, 그 때 나는 내가 될 수 있다”(마르틴 부버)는 의미를 확인합니다. 만남이 새로운 삶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과 촉매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만남만 있지 않습니다. 만남의 반대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헤어짐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만남과 헤어짐을 일컫는 말 중에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사 속의 만남과 헤어짐이 얼마나 일상사이면,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원래 회자정리(會者定離)에 연이어 따라오는 경구가 있습니다. 거자필반(去者必返)입니다. ‘떠난 사람은 반드시 되돌아온다’라는 뜻입니다. 이 두 말을 종합하자면,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반복하면 숙달에 이릅니다. 하지만, 헤어짐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슬프고 아픈 것은 매한가지이니 말입니다. 단일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성경 속에도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의 족보와 이름을 연구한 신오균씨의 <성경계보>에 의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2,197명입니다. 성경 안에 2,197명의 만남과 헤어짐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인간의 삶이 필연적으로 만남과 이별의 바탕 위에서 형성되고, 또 자라가는 것이라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분명해 집니다. 좋은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 잘 헤어져야 합니다. 서로에게 상처되지 않도록 배려하며, 축복하며 헤어져야 합니다.


창 13장에는 조카 롯과 헤어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형 하란의 아들이지만,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속자로 생각할 정도로 친자식처럼 여겼던 조카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함께 나왔던 그들은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갔다가 어려움을 겪고 다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이전 성경번역에 ‘남방’으로 표기된 네게브 지역에 도달했을 때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양과 염소에 비해 공유할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집안의 분쟁은 가진 것이 없을 때 일어나기 보다는 소유가 많을 때 일어나는 것을 보더라도 이해가 되실 겁니다. 문제의 원활한 해결방법은 많은 재산의 분리 밖에는 없음을 직감한 아브라함은 롯에게 분가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에게 좋은 목초지를 우선적으로 고를 수 있는 권한을 허락했습니다. 이럴 때 만약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빈말이라도 “삼촌 먼저 선택하시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롯은 거절 한마디 없이 단번에 눈을 들어 요단 들을 쭉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좌우를 살핀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조건을 따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단 땅을 흐르고 있는 넉넉한 물줄기와 그 땅의 풍요로움 때문에 요단 온 들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선 섭섭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해 준 게 얼마인데…’라고 본전생각도 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롯의 선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이 선택하지 않은 매력적이지 않은 다른 쪽을 향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헤어질 때 떠나가는 사람도 감정이 편할 리 없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떠나 보내는 쪽이 더 아픈 것 같습니다. 꼭 맞는 비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변에 남녀가 교제하다가 헤어진 경우, 이별통보를 하고 떠나가는 사람보다 퇴짜 맞은 사람이 더 오래, 더 많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들이 다 떠나가고 아브라함이 혼자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조카네 가족을 잘 떠나보냈지만, 얼마나 많은 기억과 생각에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찾아오시고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최초 창12장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복을 거듭 약속하셨습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보시겠습니다. 창 13:14-17입니다. 저와 한절씩 교독하시겠습니다.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절: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절: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부모를 잃고 홀로 된 조카의 보호자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아브라함은 이제 그의 품을 떠난 조카를 축복하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떠나보냄을 통해 그의 품이 한층 더 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앞으로 조카 한 명이 아니라, 수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자손들을 품는 부모가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든든한 지지와 약속 하에서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던 아브라함이 다다른 곳은 헤브론이었습니다. 오늘날 성전이 자리한 예루살렘과 더불어 유대교의 4대 성도(聖都: 예루살렘·티베리아스·제파트)를 이룬 곳이며, 아브라함의 가족 묘가 자리한 마음과 영혼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훗날 이집트에서 생을 마무리한 야곱이나 요셉이 해골로라도 그곳에 안치되기를 원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 중요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것을 떠나 신앙의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울림이 큽니다. 헤어짐과 상실의 자리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의 목소리에 청종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자리한 곳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 삶과 이후 다음 세대의 삶이 달라집니다.


상실의 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다음의 삶이 달라집니다. 이 비유 또한 아주 적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반적으로 유전병을 제외하고, 가족력이라고 하는 병력이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동일한 음식을 섭취하고, 비슷한 생활습관을 가진 가족들이 거의 동일한 유전자 속에서 유사한 질병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다른 가족들이 심혈관 쪽 병을 갖고 먼저 가셨다면 신경 쓰지도 않고 여전히 술과 기름진 음식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가리고 조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실 이후의 변화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잃으면서, 떠나 보내면서 변화해 갑니다. 그 변화가 우리를 더 우리 속의 감추인 아름다운 것이 드러나도록 견인해 갑니다. 상실 후의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의 대표적인 것을 창 13:18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2.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자리한 사람은 당연 가룟유다입니다. 누군가를 스승으로 만날 수 있고, 또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떠날 때에 어떻게 떠나느냐는 어떻게 만났느냐 보다도 훨씬 훨씬 중요합니다. 떠나는 그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죽음이 태어남보다 훨씬 중요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우리의 마지막 모습, 또는 유언을 통해 우리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배신으로 끝을 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돈 계산과 자금관리에 탁월한 세무공무원 출신 마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가룟유다에게 제자공동체의 재정을 맡길 정도로 그를 믿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그런 주님의 신뢰를 져버리고, 은전 30에 팔아넘겼습니다.


이 금액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해 보면 얼마일까요? 당시 통용되던 1세겔의 무게가 11.4그램입니다. 근래 종로 금은방에서 판매하는 은 1그램의 가격은 VAT별도로 1그램당 590원입니다. 그렇다면, 은 30세겔은 우리 돈으로 201,780원입니다. 몇년 전 12제자를 다룰 때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려면 엄청난 돈을 흥정해서 넘겨야지요. 예수님을 넘기는 대신 한몫 잡아야지요. 그런데도 그는 겨우 20여만원에 예수님을 넘겼습니다. 얼마나 가룟유다 그의 마음이 주님에 대해 뒤틀려 있었는지의 반증입니다. 실망한 주님에 대해 홧김에 말도 안되는 가격을 매긴 겁니다.


마 27:3-5를 보면 예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3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절: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유다, 그의 의도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정죄되어 대제사장집에서 빌라도 관저를 향해 끌려 가시는 것을 보고 그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자신의 충동적인 행위로 인해 스승이 심판대에 올라 십자가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 상황을 되돌리려고 받았던 돈을 대제사장에게 되돌려주려 찾아가기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사악한 그들이 악의를 결코 거둘리가 없었습니다. 가룟유다의 충동적인 배신을 도구삼아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할 뿐이었습니다.


가룟유다의 심성과 그의 충동적 배신을 잘 알고 계신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당신을 팔고 신의를 져버린 행위 조차도 알고 계심에도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부하들을 몰고 겟세마네를 찾아온 가룟유다의 차가운 입맞춤을 받아주셨습니다. 눅 22:48에 보면, 주님은 가룟유다를 향해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라고 물으시며 그와 입맞춤 후에 체포되셨습니다.


갸룟유다를 향해 그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를 향한 안타까움과 긍휼한 마음으로 울고 계셨지 않을까요? 그런 주님을 껴안고 차가운 입맞춤을 하던 가룟유다의 가슴 속엔 무엇이 다가왔을까요? 끝까지 그를 껴안는 예수님의 따뜻함 아니었을까요?


주님은 체포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찾는 당신만 체포해서 가고, 제자들은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신 사람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시려는 주님의 의지였습니다. 또한 그렇게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다음 주일에 더 상세히 나누겠습니다.



3.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앞서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만남을 통해 자라고, 사람이 되어 갑니다. 만남 속에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소명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존재가 함께 있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섭리가 그 가운데 자리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만남으로써 출애굽에 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핍박자였던 청년 사울은 바나바를 만남으로써 이방 선교를 위한 소명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만남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모세가 여호수와의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라면, 바나바가 다른 사람들처럼 청년 사울을 핍박자요, 폭도로 속단했다면, 그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그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의 덕분이겠지만, 그들에게 다가 오는 모든 만남을 소중히 가꾸어 간 그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대 청년 때에 저는 제 눈을 번쩍 뜨게 만든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매 주일 07:30분 고등부 예배 총무교사를 시작으로 10:30 초등부 부총무교사, 그리고 오후 1:30 청년부 예배 성가대 총무, 이후 청년부 총무, 심지어 주중엔 학교 총무 등 한해에 5개의 총무를 떠맡아 하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총무일이 여느 임원들보다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 챙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렇게 설교했던 그분의 영향력이 당연 미쳤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1년전 여러분의 곁에 있던 사람 중, 혹 지금은 떠나 버린 사람은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이 자기 욕심 때문에 여러분을 이용하다가 스쳐 지나간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욕망으로 인해 그들을 버린 것입니까? 1년전 여러분은 누구 곁에 있었습니까? 만약 그 사람 곁을 벌써 떠나버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불의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의로움이 불의한 여러분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이ㅇㅇ목사의 ‘요한복음’ 설교 중에서)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 또 그분들을 섬긴다는 것은 고됩니다. 마음 상하는 일이 여상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은 저의 생명과 헌신을 통해 제 곁의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나아진다는 기대와 감사 때문이었습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섬기라는 그분의 말씀이 격려와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 15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한 교회에서 만났던 그분은 20대 청년시절에 제가 만났던 분, 제게 감동을 주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로 인해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던 그분은 어느 새 이렇게 말하는 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한 해 출석 교인만 1천명이 늘어나는 교회였으니,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에 대해 굳이 신경쓰지 않는다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고, 점점 유명해 져가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우주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게 되나 봅니다. 그래서 또다른 천동설의 신봉자가 되어 존엄한 존재가 되어가나 봅니다.



4. 12명 그리고 1명


그분은 그렇다고 치고, 저는 어떠한가 지난 일주일 동안 내내, 집중적으로 되돌아 보고, 되새겨 보았습니다.






… (이 부분을 게시하지 않음을 양해 바랍니다.) …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가까워지고 정들었던 사람과의 이별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맘의 생채기를 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잃으면서도 왜 잃는지를 생각지 않고 반복된 이별을 겪는다면 이것만큼 또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남을 통해 사람되게 하시고, 우리를 사람으로 세워가실 뿐 아니라, 소명의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배역의 길 아니겠습니까!


2020년엔 우리를 떠나갔던 분들이 마음의 아픔을 딛고 하나님과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겐 회자정리(會者定離)의 흑역사를 끊고, 거자필반(去者必返)의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남을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시고, 사람으로 세워가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 아닌 ‘너’라는 타자는 나를 나되게 하고,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길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은 채 주변사람들과 경쟁하고, 내편 만들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다 마음 상하고, 떠나보내기도 했고, 우리 자신이 떠나기도 했습니다. 2020년엔 편 만들기에서 떠나 우리 곁을 내어주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행여 우리가 '곁'이 되어 준 사람이 등 돌리고 떠나거나, 우리의 반대편에 서게 될 때도 항상 ‘곁'을 내어주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서로 업고서라도 함께 진리의 길을 가는 믿음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안에서 서로를 이어주는 주님의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게 하셔서 넉넉한 품과 맘으로 서로를 자유롭게 하면서도 따스함과 위로를 주는 함께 함의 사람, 그런 교회로 존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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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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