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06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가 행하리라"(요 14:12-15)

2019년 2월 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4:12-15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설교문


1. 기도의 원리

  1. 기도의 정의 사하라 사막의 성자요,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로 불리는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기도같은 시, 시같은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기도한다는 것은 당신께 눈길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이 언제나 제 앞에 계신데 어찌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그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제자들이 당신께 청했듯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아아, 하나님!  기도의 때와 장소는 잘 선택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작은 방에 있습니다. 때는 밤, 모든 것이 잠들어 있습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멀리 들리는 닭 우는 소리는 당신 수난의 밤을 생각게 합니다. 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 이 고독, 이 적막 속에서… "그렇다. 내 아들아, 언제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네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하면서 기도하여라. 읽을 때도, 일할 때도, 걸을 때도, 먹을 때도, 말할 때도 늘 나를 눈앞에 그리며 끊임없이 나에게 눈길을 보내며,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나에게 말을 하여라. 네 눈길을 늘 나에게 보내어라."

  2. 기도의 이유 샤를 드 푸코가 이야기한 기도에는 3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를 ‘예수님께 눈길을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눈길을 돌리듯, 주님을 사랑하는 이가 주님께 눈길을 돌리는 것(기도)은 당연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도는 곧 ‘사랑’이 됩니다. 둘째,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앞서 기도를 ‘예수님께 눈길을 돌리는 것’, 곧 ‘사랑’이라고 정의한 바,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그의 요청은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됩니다. 그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이 잠든 밤, 그 고독과 적막을 도구 삼아 주님께 눈길을 돌립니다. 셋째, 하나님의 응답과 교제가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눈길을 돌리던 그의 기도는 일방적 쏟아냄의 ‘모노로그(monologue)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눈길을 나누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다이얼로그(dialogue)’가 됩니다. 정리하자면, 샤를 드 푸코의 기도 시에는 기도의 정의와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요청,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과 교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님의 응답을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할 수 있는대로 하나님께 말을 걸고,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우리의 눈길을 보내며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 우리가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  경험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말을 걸고, 하나님께 눈길을 보내야 하는 이유와 동력을 지금껏 누려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가 번번이 하늘에 닿지 못하고 그냥 공중에서 사라지는 듯한 경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주님도 모르시는 바가 아니기에 눅 16:1-8(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을 통해 ‘기도하기 어려운 이유와 그래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 이전엔 눅 11:1-4을 통해 ‘주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눅 11:5-13을 통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려주셨습니다. 이때 ‘어떻게’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 듯’이 끊임없이 간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주님은 눅 18에서도 일명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반복해서 ‘끊임없이’ 기도할 것에 대해 주문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응답없는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이 어렵고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는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눅 18:2)로 시작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자기만이 홀로 존귀하다’)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재판장이 사는 도시에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부인이 있었는데, 무척 억울한 일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줄곧 그 재판장에게 가서 ‘자신과 적대자 간에 있었던 억울한 일에 대해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안하무인 불의한 재판장이 사회 최빈민층이요, 의지할 데 없는 그런 여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뒷돈이 생길 일도 아니고,  차후 덕볼 일도 없는 시간낭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이 끊임없이 찾아와서 졸라대자 재판장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불의한 재판장이 힘없는 그 여인을 간청대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기로 작정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끈질기게 찾아와 귀찮도록 졸라댔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에도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3부분 있습니다.  첫째는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눅 18:6)는 말씀입니다. :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미는 불의한 재판장이 송사를 들어주기로 한 것이 그가 정의로워서도 아니고,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것은 끈질기게 찾아와 졸라대는 그녀가 귀찮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불의한 재판장과 비교되는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간청을 듣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미루시겠느냐?”(눅 18:7-8)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불의한 재판장을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대비될 뿐 아니라, 부르짖는 이의 자격과 신분 자체가 대비됩니다. 불의한 재판장에게 송사하는 이는 그와 아무 상관없는 가난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이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판장이 단지 계속 졸라대는 것이 귀찮아서 여인의 청을 들어주었다면(들어준 이유가 단 한가지였다면), 하나님에게는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녀들의 청을 들어줄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도 기도하는 중에 낙심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이 세상에서 이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눅 18:8)는 부분입니다. :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도의 문제가 곧 믿음의 문제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언젠가) 응답(올바른 판결)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이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의 성향과 속성 자체가 기다림과 오랜시간 동안 반복되는 것으로 형성되는 루틴(routine)을 잘 감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기도의 조건

오늘 본문은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의 연속선상에서 좀 더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선 내용들이 기도의 모본(주기도), 기도의 이유(기도해야 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기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 - 14절을 보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이 하신 일보다도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주님께 구하는 기도를 해야함을 피력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으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에 이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청탁)은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는 마치 이런 느낌입니다. ‘무언가를 아뢰고 부탁하기에 하나님이 매우 껄꺼로운 분이셔서 이전까지는 제대로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하나님 옆에 매우 다정하고 친한 주님이 계시니 대신 말씀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 모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래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고 기도했겠습니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이 말씀이 얼마나 소망이 되었으며, 용기가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의 진의를 잘못 알아들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생을 소진하며, 이교의 길을 걸어갔겠습니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면 금방 이해되실 겁니다. 만약,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기도가 타종교의 기도와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동시에 선악여부를 가리지 않고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구하는 이에게나 들어주시는 분에게 모두 복이 아니라, 재앙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의 진의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2번씩이나 연이어 강조하신 내용의 핵심은 ‘내 이름으로’라는 부분에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응답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의 절대조건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이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는 기도 마지막의 고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앞서 간구한 기도의 내용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그 여부에 상관없이 마지막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한다면,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걸맞는 것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이름과 신분에는 그에 맞는 실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에게는 ‘목회자는 이런 사람이다’는 상이 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선생님의 상이 있고, 공무원에게는 공무원의 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신분에 따른 윤리와 강령이 있는 겁니다.


물론 각각의 이 상들은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에 부합하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을 따라하거나 일탈할 때 어떻게 됩니까? 만인의 지탄을 받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전 청와대 감찰반원의 민간인 사찰부분입니다.


다시 되돌아 갑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신실하신 주님의 실상에 합당한 것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가 되어 기도한다는 것이 ‘마약’을 구하고,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을 구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크리스천이 되어 부정한 방법이라도 상관없이 목적달성되기를 구한다면 그것이 허용되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어야 함은 자명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와 같이 기도의 조건을 충족할 때 주님은 2번에 걸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행하리라”(요 14:13, 14)



3. 기도의 실행

2019년 신년예배를 기다리며 12월 한달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2019년 신년예배의 말씀이 올 한해 움오름교회가 푯대삼아 나갈 ‘표어’와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찾을까를 고민해 보지 않은바 아닙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14:14 “내가 행하리라”는 부분을 올해의 표어로 선택한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첫째, 기도는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시당하고, 가벼이 여김받는 것이 둘 있습니다. 그 둘이 성경과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이 기본이 되는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선택했습니다.


둘째, “내가 행하리라”는 주님의 확고한 응답에 합당한 필요조건을 갖추고 훈련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엇을 구하든지 행하겠다는 주님의 응답에는 확실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실상, 주님의 성품에 합당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바램(청원)으로 출발하지만, 우리의 소원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끝이 나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매번마다 이루어진다면, 우리 신앙은 시간이 가고, 연륜이 더할수록 자신과 주변을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가 신실하신 주님에 합당한 신실한 제목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눈 맞추며, 마음을 나누도록 우리가 자라가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가 깊어가야 합니다.


셋째,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것을 구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그 이외 구하지 않은 우리의 필요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 6:25-34을 통해 주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를 드시며, 걱정과 염려의 무익함과 불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결론을 지으며 주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간다면, 그 이외의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앞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한번 더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45:2-3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분명하게 새겨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보다 앞서 가며 꾸불꾸불한 곳들을 평탄하게 만들겠다. 놋쇠 성문을 부수고 쇠빗장을 깨뜨리겠다. 감추어진 보물을 너에게 주며, 숨겨진 재물을 너에게 주겠다. 그리하여 너로 하여금 내가 여호와라는 것과 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쉬운성경)


이 하나님의 책임져주심을, 하나님의 이 약속을 마음껏 누리는 2019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가시며 꾸불꾸불한 곳을 평탄케 하시고,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시는 것들을 날마다 경험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추어져 있던 보물과 숨겨졌던 재물들을 펼쳐 쏟아주시는 나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2019년이 되어야 겠습니다. 주님의 실상과 성품에 합당한 것을 구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겠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확실하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는 2019년을 보내게 되실 겁니다.



4. 실행을 위한 2019년 계획

아름다운 경주의 삶을 위해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를 통해 주님과 눈을 맞추고, 주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가려 합니다.


첫째, 신앙의 출발이요, 기본을 보여주는 출애굽기를 1월 마지막 주일 오후에 복습할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말하는 여호수아서를 2월 마지막 주일 오후에 복습할 것입니다. 


셋째, 4월 첫째주일과 둘째주일 오후에 ‘복음의 원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5월과 6월엔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를 각각 반복한 뒤 여름수련회에선 레위기서를 공부할 것입니다.


이렇게 전반기와 여름을 보낸 뒤 9월엔 복음의 원리와 하나님 나라를 다시 복습하고, 10월엔 레위기서를 다시 복습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반복하는 동안 가족님들께서는 꼭 한명씩 정해서 말씀을 나누고, 말씀으로 그분을 세워주는 일과 기도해 주는 일을 해가셔야 합니다.


이 계획을 들으시면서 ‘아니, 그 많은 것을 어떻게 다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갑자기 강공모드인지 의아해 하실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자문해 보고 싶습니다. “몇년에 걸쳐 할지도 모를 것을 이 일년 내에 하면 왜 안되는 것입니까?”


배우고 알아가고, 몸부림치는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연습해 갔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2019년 한해가 여느 해와는 완연하게 달리 책임져주시는 하나님, 이뤄주시는 하나님, 행하시는 주님을 만끽하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우리에게 소멸되지 않는 사랑을 주십시오.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dialogue이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우리 기도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을 기대하기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을 마음껏 누리는 2019년 되게 하옵소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꾸불꾸불한 생의 길을 평탄하게 하시며,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는 하나님, 숨겨진 보물과 감추인 재물을 펼쳐 주시는 은총을 한없이 누리는 진정한 ‘새해’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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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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