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1.05 움오름 주일 설교 -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요 18:1-9)

1월 12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9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3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6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설교문

1. 당연한 모습


지난주일 우리는 한글 성경에 ‘가끔’으로 번역된 헬라어 πολλάκις(폴라키스)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헬라어 사전은 이를 ‘가끔’이라는 의미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자주, 여러 번’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동일한 상황을 전해 주는 눅 22:39은 이것을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셨다’라고 증거함으로써 주님의 기도는 습관이 될 정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시요, 유일하신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그 뜻대로 살기 위해 우선순위를 하나님과의 기도에 두셨습니다. 주님이 이와같은 습관을 사셨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우리는 무슨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유월절 저녁 만찬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가룟유다는 그날 밤 예수님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3년여 동안 주님을 따라 다니다 보니 그분의 습관, 행동의 패튼을 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은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더라’고 번역된 단어는 ‘직감이나 정보에 의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조사할 필요도 없이 지금까지의 경험과 관찰에 의한 정보나 직감에 비춰볼 때 당연히 그렇다라고 아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처럼 잘 알고 있던 가룟유다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지난 경험들이 스쳐갔습니다. 가끔씩 전에 함께 신앙생활하셨던 분들 중에 새벽에 문자를 보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느라 일어나 계실 것이라 생각해 문자드립니다. 확인하는 대로 연락주십시오~” 어떤 때는 새벽 4시가 갓 넘겨 온 문자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이분들은 저를, 아니 목회자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겁니까? ‘당연히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말씀 보는 사람’입니다. ‘당연히’라는 것은 그런 습관, 그런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당연히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자연스럽게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나온 많은 시간들을 차치하고서라도 2019년 한 해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살아야 할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 드리는 것이 당연했고, 자연스러웠습니까? 하나님께 “내 형편 좀 살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형편,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기 위해 애썼습니까?


예배와 관련하여 움오름의 가족분들이 세워가셨으면 하는 기준을 고민하며 적어보았습니다.


첫째, 마음과 힘을 다해 1주일에 1번 함께 드리는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둘째, 움오름에 와서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할 때 주변 가까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셋째, 주변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할 경우 가족과 더불어, 또는 혼자서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위 3가지의 기준과는 별개로 말씀드리자면, 웬만하면 인터넷 예배, 또는 방송에서 나오는 예배라고 하는 것을 보며 예배드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은혜의 시간이라고 하실지는 모르나, 먼 안목으로 볼 때, 이런 류의 예배는 교회성과 공동체성을 훼손하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2. 가룟유다,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들


예수님이 계신 곳을 잘 알고 있었던 가룟유다를 따라 나선 사람들, 다시 말해 메시야를 죽이는데 주동자가 되었던 사람들을 본문 3절은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여기서 ‘군대’는 로마군병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예루살렘의 로마군대를 총책임지던 총독 빌라도는 이 부분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승인한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군대는 어떤 군대일까요? 바로 로마가 자치권을 허락했던 예루살렘 성전경비대였습니다. 요즘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이탈리아 로마시 한켠에 있는 바티칸의 스위스 용병 경비대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마도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그의 사위요,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승인 하에 무장한 그 군대는 몰래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 가룟유다를 따라 갔을겁니다. 그리고 가룟유다를 따르는 또 한무리의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이라고 표현된 산해드린 공의회원들의 수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엄격하게 지키는 유월절과 연이어 있는 부활절은 춘분 후 첫 번째 보름달이 뜬 다음 주일입니다. 보통 3월 말 - 4월 초 사이에 돌아옵니다. 이때의 평균 최저기온은 11℃, 최고기온은 21℃로 서울의 5월 중순기온과 비슷합니다. 월평균 일교차는 10℃입니다. 월평균 강수량은 24mm이고 월평균 강수일수는 4.4일입니다.


낮에는 좀 따뜻했으나 밤이면 꽤 쌀쌀했던 예수님 당시 유월절 전날 밤, 그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노숙할 정도를 볼 때). 그렇기에 가룟유다의 무리들은 굳이 횃불까지 들고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보름달 이후 밝은 야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3절 후반절에 의하면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요란스럽게 예루살렘성을 빠져나와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감람산을 향했습니다.


분명 이런 대대적인 야간이동, 군사들의 움직임은 예루살렘 경비를 책임지는 로마군인들의 암묵적인, 또는 뇌물에 의한 동의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치, 종교, 사회, 군사적인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담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세력인 수괴 나사렛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법과 제도를 집행한다는 그들이 법과 제도를 가장 악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참히 짓밟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스승의 습관과 삶을 잘 안다고 하던 사람은 그 밤에 스승을 팔았을 뿐 아니라, 체포하는 무리의 길잡이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류는 여지없이 반복됩니다. 교육자의 양심을 이야기하던 사람은 대학, 대학원, 박사학위마저 다 허위인 고졸출신이었습니다(고졸 비하가 아님). 하나님의 뜻을 설파하던 목사라던 사람은 "하나님 꼼짝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신학교 학위마저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는 그런 거짓선지자를 과거 명망있던 목사들까지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칭송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시대 교회의 비극이요, 가슴치며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혼탁한 신앙의 탁류 속에서 어떤 교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서 가야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신중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한 걸음씩 옮겨야 할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누구를 찾느냐?


가룟유다를 비롯한 종교권력자들과 일단의 기득세력들이 무장한 채 마침내 주님이 기도하시던 감람산 기슭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했습니다. 4절은 예수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체포조를 향해 이렇게 물으셨다고 전합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위기 앞에서 당황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주님은 군병들을 향해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당당하게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대답 앞에서 혼비백산하여 하나같이 뒷걸음치며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신적권세에 짓눌렸기 때문입니다.


땅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체포조를 향해 주님은 재차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후에 다시 등장합니다. 요 20:15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부활절 아침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열린 무덤과 사라진 주님의 시신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분명 수없이 주님의 ‘부활에 대해 들었을텐데도 막상 부활의 현장 앞에서 그 말씀이 떠오르거나 믿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 결과 사라진 예수님의 시신은 곧 누군가 옮기거나 훔쳐간 것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포기한 듯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건네신 “누구를 찾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주님 아닌 주님을 찾고 있던 마리아를 깨우는 신적 질문이었습니다. 주님 아닌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예수님의 물음이었습니다.


다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조를 향한 주님의 질문으로 되돌아 갑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는 주님의 물음은 예수님을 찾고 있는 그들을 향해 “내가 당신들이 찾고 있는 바로 그 예수다”라고 알리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나아가 그 물음은 예수 아닌 예수를 찾고 있는 무리를 깨우는 신적 질문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으되 나사렛 예수가 진정 누구이신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을 깨우기 위한 주님의 물음이었습니다.



4.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룟유다를 비롯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던 이나, 그들을 보냈던 이들이나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 출신이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익히 들었고, 분명 목격하기도 했을 겁니다. 특별히 가룟유다는 그 모든 현장, 최측근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한번 어긋난 채로 조율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은 가장 은혜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은혜인줄 몰랐습니다. 가장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느끼고, 만나지 못했습니다. 가장 지근거리에 있었음에도 하나님을 몰랐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마지막까지 가룟유다에게 알려주시려는듯, 주님은 당신만 잡아가고 다른 제자들은 놓아주기를 구하셨습니다. 8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당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끝까지 제자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가룟유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돌아선 마음이니 당시는 그 모습조차 구차해 보이고, 싫었겠지요. 하지만, 그 밤이 채 지나기 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회오에 젖었을 때 그는 분명 인간의 약함마저 떠안으실 뿐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보았을 겁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시던 그 선한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은 처절한 후회와 더불어 주님께로 되돌아 섰어야 했는데, 스스로가 그 길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달리 어떤 면에선 가룟유다보다도 더 비열하게 3번씩이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섰던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를 통해 그가 경험한 주님, 알게 된 주님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벧후 3:9입니다.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가룟유다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스승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가 보기에 베드로의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일까요? 임의로 주님을 이런 분이라고 규정해 버린 것,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스스로 단정지어 버린 것! 그래서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것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성공회 신부이며,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오늘날 교회의 문제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교회가 힘을 쓰지 못하고, 연약함을 가진 근저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곧 하나님의 도(ways)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의 진단에 의하면 이러한 사태는 두 가지 불행한 경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첫 번째 경향은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풍조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 이는 인간에 대해서는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소하게 생각하는 풍조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망원경을 잘못 집어들고 반대쪽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을 아주 왜소하게 축소해 버립니다.


게다가 죽음, 영원, 심판, 영혼 등에 대한 생각은 모두 현대인이 보기에 '유행에 뒤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것들을 소리 높여 상기시키는 대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주제들을 과소평가하는 습관을 형성해 왔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풍조에 항복해 버린 그리스도인의 삶은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린 가룟유다의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경향은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회의주의에 의해 혼란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300년 이상 르네상스식 사고방식 안에 있었던 자연주의라는 누룩은 서구의 사상에서 암적 존재가 되어 왔습니다. 깔뱅주의의 대척점에 섣던 17세기 아르미니우스 교도들과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직접 또한 완전하게 통제하신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신반의했으며, 때로 저항했습니다. 그들이 취하는 입장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전제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은 맹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역사적 기독교의 많은 사건들 역시 더불어 비난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토대가 되는 사실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셨는가? 예수님은 영적인 인간 이상의 존재였는가?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정말로 일어났는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가상의 인물이 아닌가? 등등.


이 속에서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한 교회는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대의 풍조를 따르는 기독교적 지성과 현대의 회의주의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혼탁한 공기 속에서 순전하게 하나님을 알려하고, 또 하나님과 교통해 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무장한 채 힘을 잃은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연명해 오고 있습니까?



5. 2020년 표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2019년 표어 “내가 행하리라”는 말씀에 이어 2020년 표어를 위해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무엇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트랜드가 되어버린 무기력한 교회에서 일어나 생기있는 교회,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할까?’


그 고민과 기도 끝에 만난 질문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는 주님의 신적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찾는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그분과 지근거리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혹 주님 아닌 주님을 믿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예수님을 소개하며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니 단 한 시간이라도 이 땅의 역사 속에 분명히 오셨고, 지금도 살아 함께 하시는 그 예수님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앎과 열정이 있습니까?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의 번영을 배경으로 끝없이 타락해가는 유다인들의 모습에 탄식하며 경고했던 선지자가 호세아입니다. 그가 쓴 예언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일성을 토하고 있습니다. 호 14:9입니다(구약 p.126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누가 … 알겠느냐?”는 물음으로 끝을 맺는 호세아서의 전체 메시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어를 하나 들라면, 그것은 ‘앎’,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 앎은 특별히 창조주를 저버리고, 자기생각대로 잘못 알고, 또한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가벼이 여기는 시대를 향한 경고였습니다.


'호세아'라는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서 여호수아나 예수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호세아는 모형론으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의 시대를 향해,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을 향해 했던 예언은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반향으로 울려옵니다. 호 6:3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지난 한 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본분을 감당하며 존재했는지요? 이런 질문과 더불어 2020년엔 지난 해와 단절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연속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되돌아 봅니다. 올 한해는 자연스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서 갈 뿐 아니라,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더더욱 알아가고, 주님과 더 친밀해 가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스스로가 규정한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능력에 갇혀 고상한 문명인이 되는 것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악하고 혼탁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갔던 신앙의 선배들처럼 순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2020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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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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