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사순절 40일 움오름 묵상

2019년 4월 23일 업데이트됨


묵상의 말씀
  • 요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 요 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성경 속으로


금요일이 저물고 막 안식일이 시작되려던 때, 빌라도를 찾아와 당돌하게 예수님을 시체를 내 놓으라고 요구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라마’의 헬라식 이름으로 오늘날의 ‘Rentis’. 예루살렘 서북 32km에 있는 구릉지대로서 사무엘 선지자의 고향) 요셉과 니고데모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모의했던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기에 매우 의아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공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거나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세력들로부터 받게될 위해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깊이 공감하며 도왔던 '시름하는 동조자’였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역사의 새로움을 대망하면서도 누리던 기득권을 내려놓지는 못하던 그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당돌하게 나섰습니다. 그것도 방금 전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이끌던 우두머리인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은 직후였으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시체를 요구를 받던 빌라도 또한 순간 당혹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었던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이나 둘 다 매 한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법 당국에 의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노라 장담했던 제자들마저 모두 등지고 도망간 상황에서 예수님과 연루되는 것은 분명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어떻게 그런 과감한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유태인의 규례상 시신과 접촉하면 불결한 자가 되어 유월절 대축제에 참여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안식일도 지킬 수 없는 범법행위였습니다. 더군다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동료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의 비난과 공격을 받아 지금까지 누렸던 것들을 모두 상실할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아무 이익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양심이 문제였습니다. 양심을 통해 참 사람의 자리로 부르는 하나님의 소환장에 응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삶을 내어놓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주저함을 떨치고 일어나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갔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들은 한 때의 평안을 위해 평생 자책에 시달리며 살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앙 양심에 따라 살기로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다함없는 영원한 생명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영혼 속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때론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각오하며 선택한 길이 영혼의 해방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불굴의 용기로 끝없이 나아갔던 사람에 의해 변했다기 보다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온당 해야 할 일을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나아져 왔습니다.


사랑과 헌신의 진정성은 그 대상이 죽은 이후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했던가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모습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는지를 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의 '시름하는 동조자’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목도합니다. 이와같은 이들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그림 속으로


만약 그림을 의뢰하는 고객이 유명화가의 그림을 가리키며 그것처럼 그려달라면 화가는 어떤 고민을 할까요?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민이 될 겁니다. 특히 그와 같은 무례한(?) 부탁을 한 사람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권력의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더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똑같이 그린다면 모작이나 다름없었을 터이니 기본 틀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해석과 기법을 표현할지를 깊이 생각하며 작업했을 겁니다.


렘브란트의 <Deposition from the Cross,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의뢰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총독 오라녜 공 프레드릭 헨드릭이 7개로 구성된 예수님의 십자가 연작을 렘브란트에게 의뢰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안트웨르펜 대성당의 루벤스의 그림처럼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그림은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가 평생동안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바로 그 그림입니다.


평소 커튼 속에 감춰 놓아 '금화 한 닢'이 있어야만 볼 수 있었기에 꿈에만 그리워 했던 그 그림을 네로는 마음씨 좋은 성당지기 아저씨의 도움으로 이 그림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루벤스의 그림으로 행복하게 잠들던 네로… 성당 안에서 죽어갈 때 죽은 네로의 영혼이 파트라슈가 이끄는 우유 수레를 타고 천사들과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던 그 유년시절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다시 그림으로 되돌아 갑니다. 총독의 요청에 의해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이 1633년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림과 루벤스의 그림을 비교해서 보면 렘브란트의 작품세계를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렘브란트, 1633년> <루벤스, 1614년>



먼저 구도 면에서 보면 루벤스의 그림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한 곳으로 모여 있고, 사선의 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리스도를 내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고, 수직적 구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을 루벤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렘브란트는 루벤스와 동일하게 흰색 아마포(linen)에 싸여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께 빛이 집중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루벤스가 그린 죽은 그리스도는 여전히 근육이 풀리지 않은 건장한 육체를 가진 반면 렘브란트가 그린 그리스도의 몸은 볼품없이 축 늘어져 있습니다. 루벤스는 구약시대 동물제사를 연상토록 할 뿐 아니라, 영웅적인 그리스도로 그렸지만, 렘브란트는 그리스도의 연약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여인들의 경우도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루벤스는 아들의 시신에 손을 대며 애처로이 바라보는 어머니를 표현한 반면, 렘브란트는 어둠 속에서 실신해 있는 어머니로 그렸습니다. 또한 루벤스는 예수님의 발을 어루만지며 바라보는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 꿇고 유심히 바라보는 다른 마리아를 표현한 반면 렘브란트는 다른 여인들은 시선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을 보며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예수님을 내리는 제자들의 위치입니다. 루벤스는 아리마대 요셉이 시신을 내리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그는 귀티나는 옷을 입고 시종들을 도와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아래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사도요한이 받아 안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이하게도 루벤스는 종교개혁 이후 당시 반카톨릭적 풍토를 바꾸어 보려는 듯 요한을 추기경 복장을 한 사람으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이와 완전 다르게 그렸습니다. 화려한 종교적 치장에 반대하고 엄격하면서도 내면적 성찰에 관심을 둔 개신교인답게 조용한 가운데 삶과 신앙을 고뇌하고 또 그것을 지키려는 묵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부유한 아리마대 요셉은 십자가에서 약간 떨어져서 지팡이를 짚고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수한 복장을 한 채 예수님의 시신을 조심스레 내리는 사람이 다름아닌 렘브란트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두 군데 그려놓은 작품입니다. T자형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관계된 사건임을 렘브란트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고통 속에 죽으신 주님과 함께 하며 십자가 옆에서 울고 있는 그를 보니 찬송가의 한 부분이 떠오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그럼, 이제 1634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실까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렘브란트, ‘Deposition from the Cross’, 1634, Oil on panel>

1634년 작품은 전년도의 것과 비교해 훨씬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배치에서 기인되기도 하겠지만, 가장 주된 요인은 빛의 사용에 있습니다. 1634년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윗쪽은 지는 햇볕에 비껴진 모습이었다면, 1634년 작품은 마치 연극에서 스팟조명을 사용한듯이 십자가 주변에만 유독 빛이 반사되어 퍼지게 했습니다. 그 빛 속에서 흰색 아마포(linen)에 싸인 그리스도가 더더욱 창백하고 애처로워 보입니다.


십자가에는 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내리느라고 분주한데 우쪽에는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던 나이든 마리아가 충격을 견디지 못해 실신해 있습니다. 죽은 아들과 똑같은 창백한 얼굴의 어머니를 통해 아들의 죽음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고, 아픔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또 다른 여인들이 세마포를 편 채 주님을 누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 제자들이 줄행랑을 친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주님을 따라 십자가 아래까지 왔을 뿐 아니라, 주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배웅하는 여인들의 사랑과 헌신이 참 눈물겨워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십자가에서 내리는 제자(요한 or 니고데모)의 모습으로 본인의 얼굴을 그려 놓았습니다. 반복되는 이런 유형을 보며 렘브란트가 16세기 이냐시오에 의해 체계화된 관상기도를 평소 즐겨 해오던 사람이지 않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1633년 작품에서 오른쪽 하단 부분에서 거리를 두고 비스듬히 십자가를 바라보던 아리마대 요셉이 1634년 작품에서는 등을 내보이며 십자가 바로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술서적을 전문으로 만드는 이탈리아 파이돈(Paidon) 출판사가 2007년에 ‘Crucifixion(십자가에 달리심)’이라는 주제로 200여 작가의 작품들을 모아 출판했습니다. 일일히 모든 작가들과 렘브란트를 비교한 것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도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고유의 독특성과 영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렘브란트가 개신교인이 아니라, 루벤스와 같은 카톨릭 신자였다면 또 달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성당에서 위탁받아 더 많은 성화를 제작하며 카톨릭의 요구를 수용한 종교화로 그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회 내에선 성상거부의 정서가 매우 강했기에 교회를 위해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위탁받은 이 작품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련된 작품을 숱하게 작가의 신앙고백과 더 깊은 관련성이 있게 표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루벤스가 마치 엄청난 제작비에 헐리우드 초호화 캐스팅을 더한 블록버스트 영화같은 느낌이 든다면,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독백풍의 연극 같은 느낌이 듭니다. 루벤스나 렘브란트 모두 움직임과 빛에 뛰어났던 바로크시대의 대표적 화가였지만, 어떤 신앙적 환경과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얼마나 작품을 표현하는 것이 달라질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같은 주제로 17년 후인 1651년에 그린 그림을 보시겠습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것이 바뀌었으며, 그 바뀐 것을 통해 렘브란트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일까요?


<렘브란트, ‘Deposition from the Cross’, 1651, Oil on panel>


1634년도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무엇이 달라진 것 같습니까? 마치 사진 촬영 후 편집과정에서 원하는 앵글을 만들기 위해 자르기 하듯이 1634년의 작품을 자른 후 확대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중요한 인물들의 크기를 확대하여 보다 집중하고자 하는 부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651년 작품엔 어머니 마리아도 전신보다는 얼굴 표정이 더 잘 드러나게 그렸고, 좌측에 세마포를 준비하던 여인들도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침울하고 가라앉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만큼 촛불을 든 사람도 소년에서 나이든 장년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내리는 니고데모도 거의 탈진한 노인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축 늘어져 더 여위어 보이는 예수님의 몸조차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힘들어 보입니다. 곧 쓰러질 듯 탈진한 그는 초점없는 시선으로 슬픔과 고통을 온 몸안에 새겨넣고 있습니다. 그의 입은 벌어져 얼이 빠진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슬픔으로 몸의 균형을 온통 잃어버린 상태로 십자가에 서 있습니다. 죽은 그리스도를 거뜬히 들어 내리던 1634년도의 니고데모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렘브란트는 왜 이렇게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바꾸어 표현했을까요? 많은 렘브란트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렘브란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녀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충격에다 가정부(헤르트헤)와의 불화로 법정에 서기까지 하는 등 그는 심적이든 육체적이든 어느 것 하나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지칠대로 지쳐 예수님을 끌어안을 기력조차 없는 상태로 서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쓰러지는 이가 자신 뿐 아니라, 한 분이 더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시신이 된 아들이 내려질 때 오열하고 통곡하다 정신을 잃은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은 사랑하는 이를 황망하게 떠나보낸 렘브란트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삶이 자신만의 어려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하는 이라면 겪게 되는 숙명적인 몫임을 그는 깨달았을 겁니다.


또한 삶이 너무 힘겨운 주님처럼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처절한 아픔이 가슴을 파고 들 때, 그리스도의 마지막을 힘을 다해 함께 했던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니고데모가 힘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처참한 죽음을 체험했지만, 실은 죽은 그리스도로부터 비치는 빛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 그들처럼 렘브란트 자신의 절망과 공포도 언젠가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과 생명으로 바뀌어 갈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삶 속으로


<L’Étranger,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생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감각’을 들었습니다. 엄격히 말해 우리에겐 죽음의 체험이란 없습니다. 단지 죽는다는 수학적 확실성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수학적 확실성이라는 것이 100%에 이르는 필연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 사람들은 태연히 살고 있습니다. 마치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되돌아가는 것 같은데, 실은 그것은 죽음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뺨을 후려쳐도 이미 영혼이 떠난 육체에서는 아무런 손자국도 남지 않는 것처럼 무감각을 안고 허망한 삶을 살아갑니다. 말이 삶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숙명의 조명아래 죽음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허망한 질주일 뿐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허무에 함락되어 그 노예로 죽어갈 것인지, 아니면 의를 찾아 생명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오늘 만나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그 단초를 제공합니다. 현재의 누리는 것을 꼭 움켜 잡으며 살 것인지, 아니면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가 나사렛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할 것인지.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며, 우리도 언젠가 내려지게 될 우리의 죽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그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삶을 어떻게 살지를 묻습니다.


지난 4월 17일(수) 20여명의 사상자를 낸 진주 아파트 방화사건과 같이 우리 사는 사회는 분노와 폭력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이 어두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직시하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어둠에 함몰되어 타인을 탓하며 어둠의 한 부분이 되어 더더욱 검게 덧칠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비록 온 세상이 컴컴하여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로부터 비쳐오는 그 빛에 의지해 꿋꿋하게 걸어가야 할까요?


주님이시라면 어떤 사람을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돕는 동역자로 택하실까요? 어떠한 삶이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하는 일이고, 어둠이 드리워진 공간에 빛을 끌어들이는 주님의 일, 우리의 일일까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빛이 사라진 그 컴컴한 시기에 되려 빛을 따라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선택과 걸음은 소망이 절망의 옷을 입은 위기의 때에 렘브란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희망의 심지가 잘려나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는 이로서 무엇을 바라보며 걸어야 할지 보여줍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 어떻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의미를 새겨야 할지 가르쳐 줍니다.


생명의 아침을 바라며 무덤의 돌이 옮겨지기를 기다리는 부활 하루 전. 암흑이 빛을 대신한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으로부터의 빛에 기대고자 가만히 주님을 안아 봅니다.




소의 걸음


*p.s: 렘브란트와 더불어 함께한 사순절 묵상을 마무리 합니다. 조그마한 핸드폰 글씨로 묵상의 풀섶을 아침마다 헤치며 오솔길 걸으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애 쓰신 만큼 의미도 더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저도 행복하고 보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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