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사순절 39일 움오름 묵상

2019년 4월 22일 업데이트됨


묵상의 말씀
  • 요 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성경 속으로


꿈으로 시작해서 꿈으로 끝을 맺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 어느 것일까요? … 아마도 그것은 마태복음이 아닐까요? 마태복음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천사가 꿈을 통해 요셉에게 가르쳐 주는 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에게 꿈으로 말씀하시고, 요셉에게 일어나 애굽으로 가라는 등 중간중간에 꿈은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주요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둔 금요일 새벽 재판장에서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로 마무리 됩니다.


빌라도 아내의 꿈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꾸었던 꿈에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았기에 그의 남편이 무고한 예수님에게 관여치 않기를 간청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빌라도 또한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석방시키고 싶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말할 정도로 무죄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예수님을 살리려는 최후의 마지막 시도를 했습니다.


그것은 관례를 따라 명절에 한 명의 죄수를 특별사면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그 권한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살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님과 극악한 살인자였던 바라바를 언급하며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석방하겠다고 제시했습니다. 물론 당연히 예수님이 선택될 줄 기대했습니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빌라도의 부인이 보낸 사람의 다급한 전갈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꿈에 너무나도 힘들었다며, 죄없는 그 사람을 석방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습니다.


매우 대조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총독 관저 밖에서는 유대 지도자들에 선동당한 백성들이 살인자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은 죄가 없다며 간청합니다.

  • 마27:19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저 옳은 사람(예수님)으로 인해 꿈 속에서 애를 많이 썼다’고 했습니다. ‘애를 쓰다’는 헬라어 πάσχω(파스코)는 신약에서 40여회 쓰였는데, 대부분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의 백성들의 ‘고난’과 관계됩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의 ‘수난’으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마저 배반 후 도망가고, 자기 땅의 백성들마저 외면하는 때에 이방여인이 주님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그 고통에 애를 썼다(πάσχω)고 하니 말입니다.


부당함과 불의가 옳음과 정의를 뒤덮어 버린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요? 오로지 사랑함에 극단적이었기에 그 사랑으로 죽어가신 주님의 πάσχω(파스코). 모두가 등 돌릴 때 유일하게 그 고통의 πάσχω(파스코)로 한 여인은 몸부림쳤는데, 우리는 무엇에 몸 부림치고 있을까요?


……


빌라도로부터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때는 유월절 하루 전 준비일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도록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울 수 있도록 빌라도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신속히 집행되었습니다. 오후 세 시경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친 후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인간 예수의 몸으로 사셨던 주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림 속으로


렘브란트 이전 많은 화가들이 원판을 다량으로 복제하기 위한 기술적 방법으로 에칭 작업을 했습니다. 이에 반해 렘브란트는 자신의 예술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에칭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완성한 후에도 고치고 또 다시 고치는 등 매번 풍부한 기법과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부식작업이 끝난 에칭 원판에 다시 드라이 포인트 작업을 가했으며, 이도 모자란다고 생각이 들면 조각칼로 판을 깎아내는 고된 작업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 작업이 더해질 때마다 새로운 원판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작품들을 보면, <에칭, 드라이포인트, 뷰린(조각칼)>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렘브란트의 에칭 작품 가운데 대표작인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도 이와같은 작업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1655년 작업한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는 작품과 1665년에 수정된 작품을 비교하면서 보시면 이 작품 속에서 렘브란트가 무엇에 집중했으며, 어떤 메시지를 호소하고 있는지 듣게 되실 겁니다.




<렘브란트, ‘이 사람을 보라’, 1655년, 에칭에 드라이포인트>



작품은 앞선 성경 이야기 속의 빌라도 법정이지만, 실제 모습은 암스테르담의 새 시청건물을 배경 삼아 있습니다. 그림 속 청사엔 빌라도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조각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좌측 정의의 여신 페미다가 눈을 가린 채 한손엔 저울을, 다른 한손엔 칼을 쥐고있습니다. 다른 쪽엔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헤라클레스가 한손을 선반에 놓고, 다른 손으로 몽둥이를 쥐고 있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풍인 건물 좌측 2층 베란다 네덜란드의 귀공녀 차림의 한 여인이 근심스레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큐라 (Claudia Procula)입니다.


총독관저 앞 재판정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태인들 앞에 세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Ecce Homo(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빌라도의 이 말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정의로운 법 집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유지키 위해 비열한 세력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에게 부당하게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의 법정을 자기 시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권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 후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한 상업국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거의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물질적 번영을 바탕으로 개혁신앙을 추구하던 공화국을 향해 정의와 권력이 제대로 손을 맞잡지 않으면 불의로 사람을 죽이는 빌라도의 법정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힘과 권력의 신이 정의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른손을 선반에 기댄 채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나온 예수님의 몸은 단단한 밧줄에 묶여 있습니다. 수갑을 찬 듯 두 손은 포승줄에 묶인 채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마냥 가만히 서 계십니다. 더 이상 따르는 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호하는 이 하나없는 냉혹한 법정 위에 서 계십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굶주린 야수 마냥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대며 달려들 태세입니다.


“당신이 이 사람을 놓아준다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요.” 선고를 주저하는 빌라도의 심경을 간파한 듯 대제사장이 결정적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협박같은 그 위협적인 한 마디에 빌라도는 우물쭈물하며 서 있습니다.



<렘브란트, ‘이 사람을 보라’, 1665년, 8판>


1655년 작품에 이어 1665년의 제 8판 작품을 보시겠습니다. 수많은 수정작업이 이뤄진 것이 보이십니까? 얼핏보기엔 이전 작품보다 훨씬 미완성 작품으로 보이지만 여기엔 특유의 강한 흡입력이 있습니다. 작품의 하단 정면부엔 지운 흔적이 확연하고, 그 속에 유령같은 인물이 관객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Ecce Homo>의 6번째 판부터 뚜렷하게 고친 곳이 바로 법정 하단 부분입니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유태인 군중들을 제거하고 법정 하단 전면부에 두개의 큰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마치 해골의 눈 같기도 한 두 구멍 사이에 머리카락을 풀어해친 한 사람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그리스 신화 속 죽음의 강과 지하의 신 하데스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의 형상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어느 것이다 단정지을 수는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개신교인이었던 렘브란트가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했다기 보다는 처절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육체적 고통, 제자들의 배신,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 하나님으로의 완전한 단절 같은 것들의 형상화입니다.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 후 지옥에 까지 내려가실 것에 대한 예시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인지 예수님의 모습이 무척이나 나이들어 보이고 서글퍼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렘브란트의 <Ecce Homo>를 ‘가장 슬픈 왕의 초상’이라고 하기도 하며, ‘우리의 원죄가 해결받는 순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을 확대해서 살펴보니 그 눈빛이 군중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을 쳐다보는 우리를 향하고 계십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삶 속으로


누군가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것의 하나가 ‘초월적 형이상학의 바탕’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말인 것 같은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신)을 상실한 채 세속적인 물욕만 추구한다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대에서 근원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 밖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렘브란트의 판화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비방과 모방이 난무한 빌라도 법정에서 말없이 서 있는 예수님은 이해보다는 오해 받았고, 경외보다는 시기되었으며, 칭송보다는 비난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분의 진실은 신성모독이라 오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의 사랑이 아니라, 눈빛과 온몸에 배어 있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모함하며 죽이려는 그들도 사랑하고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랑,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인해 죽어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랑은 그처럼 강하지도, 순전하지도 않습니다. 허약한 체력을 드러내며 베드로처럼 칼이라는 손 쉬운 방법을 꺼내 듭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불법과 부정이 조작되고 자행됩니다. 변종이 본래의 것보다 훨씬 본질다워 보이고 강해 보이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눈멀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잃어버린 채 변종적 사랑의 MSG에 길들여 사는 것은 아닐까요?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속의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원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할지 보여주는 좌표가 됩니다.


이 땅 그 누구도 기대치 못했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영접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검정물감을 뿌려놓은 듯이 검게 보이는 빌라도의 재판장 위에 서 계십니다. 점점 밀려오는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분은 피하지 않고 직면하겠다는 듯이 서 계십니다. 렘브란트의 <Ecce Homo> 이 작품 속에서 2천 전 부당하게 판결내렸던 빌라도의 법정을 봅니다. 그리고 오염된 신앙으로 정의를 억압하던 렘브란트의 시대를 그려봅니다. 나아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대신한 종교권력과 권력의 노예가 된 우리시대 법정을 봅니다.


빌라도의 법정 위에 서셨던 주님을 떠올리다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그 눈과 시선을 맞추는 성금요일 아침… 우리는 저 법정 어딘가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요?




소의 걸음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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