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사순절 37일 움오름 묵상

2019년 4월 22일 업데이트됨


묵상의 말씀
  •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성경 속으로


성경 속에서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를 꼽으라면 어떤 것이 떠오르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나갔던 아들이 돌아오는 이야기, ‘탕자의 비유’를 주저없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이야기를 첫번째로 손 꼽을까요? 어쩌면, 그 아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와 결을 같이 하기 때문 아닐까요?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든, 어떤 방탕한 삶을 돌아 왔든지, 언제나 우리를 따뜻이 맞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 때문 아닐까요?


탕자의 이야기는 눅 15장의 3가지 잃어버린 것(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한 므나,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은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 한 아버지 아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째 아들이 갑자기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요구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인데, 1세기 고대 유대인의 문화 속에선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 말의 뜻은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셔야 내 재산이 될텐데…’라는 의미였으니, 얼마나 폐륜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는 너무나도 순순히 재산을 떼어줍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자마자 둘째 아들은 부동산을 신속히 현금화하여 먼나라로 떠났습니다. 이 사실은 적어도 1세기 당시 3가지를 저버린 막장행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가족과 동족’을 배반한 행위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떠났다는 먼 나라는 거리상 먼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종교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먼 나라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는 옆에는 '데가볼리'라고 불리는 헬라인 거주지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둘째 아들이 꿈꾸던 이상적 문화가 있는 곳이었는지 모릅니다. 전재산을 모두 탕진한 그가 돼지를 키우는 집에 들어가 끼니를 이으려 했던 것을 보면, 그는 데가볼리로 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들은 유태인으로서의 신앙도 자존심도 모두 내팽개 친 셈이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유롭게 살겠다며 집나간 그 아들은 굶어 죽게 되자 아버지의 집으로 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되돌아 온 아들을 껴안으며 아버지는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라며 송아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렸습니다.생각치도 못한 대대적인 환영식이었습니다.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아버지는 왜 이토록 과하게 둘째 아들을 환영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 가족, 동족을 저버린 아들을 동네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고,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집에 돌아온 아들이 집 밖 마을공동체에서 발 붙이고 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으로


렘브란트가 누가복음 15장에 바탕한 ‘탕자의 귀향’을 완성했던 해는 1669년, 그가 생을 마치던 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탕자에 대한 유일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소천하기 전까지 탕자를 소재로 모두 7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그가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이야기였으며, 그의 평생에 걸쳐 지속된 천상의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볼 때, 특별히 1669년 마지막 완성한 ‘탕자의 귀향’은 지금까지 모든 작품들의 귀결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렘브란트는 왜 생애 마지막 해에 탕자의 이야기를 화폭에 남겼을까요? 결혼 8년만에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가 의지하던 아들 티투스마저 1668년 잃고 말았습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상실감에 몸서리 칠 때 그의 눈에, 그의 가슴에 들어온 것은 아버지의 집, 본향… 탕자가 아버지의 긍휼을 믿었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듯이, 그도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에 기대며,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이유로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돌아온 아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더불어 그를 맞이하는 아버지에게도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세속적 쾌락에 빠졌던 아들, 여호와 신앙도 내팽개친 채 이방문화 속에서 돼지를 쳤던 지저분한 아들. 그 아들이 역겹고 냄새날 법 한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덥석 안아줍니다. 그러자 그 품속에서 ‘죽었던 아들’은 다시 태어납니다. 잃어버렸던 그 아들을 찾은 아버지에겐 잃어버린 재산은 무론이거니와 현재 소유한 재산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위해 온 동네잔치를 배설해 축하했습니다.


이러한 기쁨과 감격을 표현한 렘브란트의 마지막 해 작품 <탕자의 귀향>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9년, 유화,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첫째, 작품 속 빛의 근원지입니다.

: 많은 평론가들이 <탕자의 귀향> 속의 빛이 비춰오는 부분을 좌측 상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림 속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표현된 아버지의 얼굴(이마)이 빛의 근원지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그 빛이 돌아온 아들을 포근히 감싸며 비춥니다. 그리고 우편에 말없이 서 있는 첫째 아들 또한 그렇게 비춥니다. 그러고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빛이 절실한 존재였지만, 첫째 아들 또한 아버지의 그 빛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였습니다.


둘째, 아버지의 모습(반쯤 감긴 눈, 모양이 다른 두 손, 그리고 옷)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돌아온 아들을 제대로 쳐다 볼 시력조차 없는듯 아버지의 오른 쪽 눈은 살짝 드러나 보이지만, 왼 쪽 눈은 시력을 다 잃은 듯 감겨있습니다. 사랑에 눈먼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왼손은 가늘게 펴 있는 반면 오른손은 움켜잡고 있습니다. 왼 손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감싸고, 오른 손은 아버지의 강함으로 그를 붙잡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이렇게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과 강한 아버지의 손을 함께 배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인 동시에 어머니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입은 옷 위에 걸친 붉은색 망토가 눈에 들어옵니다. 고귀한 신분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열려진 그 모습이 마치 암탉이 새끼를 품는듯한 연상을 하게 합니다.


셋째, 돌아온 둘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 집나갔던 아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귀향했습니다. 머리카락 한올없이 아버지의 품에 안긴 그의 모습은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이의 표지입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입은 옷은 완전 헤어진 누더기입니다. 그의 발 한쪽은 신발을 신었지만, 다른 쪽(왼발) 발엔 신발이 벗겨져 있습니다. 이는 왼쪽과 오른쪽의 통념적 구분으로서 그의 타락했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더기 행색을 한 아들의 오른 쪽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입니다. 그것은 렘브란트가 그려놓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아버지와 가족과 동족을 배반하고, 신앙조차 져버렸던 타락했던 삶, 모든 것을 잃었던 방탕한 삶이었지만, 끝내 버리지 않았던,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징표였습니다. 아들은 그것을 꼭 간직한 채 아버지의 긍휼 안에 안겼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환대한 진정한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넷째,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 그림 속 우편에 아버지의 복장과 꼭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분위기와 가장 닮지 않은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팔짱을 굳게 낀채 돌아온 동생을 근엄하게 내려다 보는 첫째 아들입니다. 검은 그림자 드리워진 그의 오른 손은 빛으로 빛나는 왼 손을 꼭 잡은 채 억누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활짝 반기는 두손과 무척 대조를 이룹니다. 어둠이 빛을 짓누르는 이 형상을 통해 그의 복잡한 내면의 심정이 드러나 보이는 듯합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아버지와 동생을 노려보는 듯한 그의 눈엔 노기가 서려 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아버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굳게 닫힌 그의 입술엔 잃어버린 동생을 찾았다는 기쁨은 커녕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는 분노가 흐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라고 항의하던 그의 목소리엔 돌아온 동생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이 더 자리해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 사용에 대해 항의하는 그도 가만보면, 어떤 면에서 하루 빨리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내 맘대로 쓰려는 방탕한 아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섯째, 어머니의 부재입니다.

: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에 보면, 아버지가 부재합니다. 엄마도, 누나도 있지만 아버지가 부재한 위태한 시기를 남은 가족이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갑니다. 이에 비해, 눅 15장 탕자의 가족 속엔 어머니가 부재합니다. 어머니의 부재를 의식이라도 한듯 렘브란트는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 어머니의 모습도 함께 담아 놓았던 걸까요?


그런데 왼쪽 상단을 보니, 그림 속 제일 검게 드리워진 부분에 한 여인이 돌아온 아들과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집안 일 하는 하녀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임을 말하는 듯 보석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의 얼굴엔 기쁨이 없습니다. 어머니라고 하기엔 너무 젊은 면이 없잖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그 어떠한 모성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역시 어머니의 부재이며, 모성의 부재입니다. 모성은 오직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 속에서만 흐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탕자의 이야기’는 아버지, 탕자, 첫째 아들 등 세 사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속엔 모두 6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탕자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팔장을 낀채 노려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환대와 용서의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술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마음 속엔 질투와 분노, 그리고 교묘한 독선으로 덧칠한 감정만이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여기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도다”라는 아버지의 선언은 이사야 62:4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삶 속으로


집 나간 아들의 이야기를 곰곰히 들여다 보니, 그것은 방탕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방탕한 세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집 나갔던 아들은 당연하거니와 집 안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던 큰 아들 역시 아버지와 상관없는 방탕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니, 아버지는 결은 다르지만, 두 아들보다 더 방탕(흥청 망청한)한 아버지입니다. 앞뒤 재지 않고 아들을 위해 아낌없이 다 내어주는 아버지야 말로 진정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가 되어버린 교회에서는 두려움과 이기심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율법에 순종하며 쌓아온 자기 의는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는 큰 아들이 되라고 부추깁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 없는 신앙입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아버지 집의 진정한 아들이 되는 것은 교리와 도그마(규범)의 총체같은 큰 아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맡김의 삶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진정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길을 보여 줍니다. 그 길은 렘브란트가 그린 것처럼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치는 아버지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의 찌끼들을 퍼내고 비워낼 때마다 쓰라리고 아프지만, 누군가 숨을 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탕자의 귀향>은 끝내 우리가 다다를 곳이 어디인지를 가리킵니다. 그곳은 바로 ‘아버지’, 사랑에 눈이 먼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잘못 들어선 길에서 부서지고 망가진 우리 영혼이 의존할 최종적인 은신처가 됩니다. 렘브란트는 이 불후의 명작을 통해 바로 이 사실을 애잔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 그림을 묵상했던 헨리 나우웬이 《모금의 영성》 중에서 남겼던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당신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 관계가 힘들 때는 사랑을 선택하라, 서로 하나 되기 위해 상처 입고 쓰라린 감정 사이를 거닐라, 마음으로부터 서로 용서하라”


고난주간의 수요일,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속에서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임을 발견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완고한 팔짱을 풀고 그 무모한 사랑으로 돌아온 동생을 안아주는 아버지가 되기를… 그런 어머니가 되기를…





소의 걸음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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