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사순절 34일 움오름 묵상

2019년 4월 22일 업데이트됨


묵상의 말씀
  • 창 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 창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 창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성경 속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상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언은 본인 사후 반드시 조상의 묘지에 장사 지낼 것에 대한 당부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후 육신이라도 고향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결의가 아니라,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의 발로였습니다.


그 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의 병세가 급격히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요셉이 두아들을 동행시킨 이유는 할아버지 문병과 더불어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두 아들이 애굽 여인(제사장 보디베라 딸 아스낫)의 소생이었기에 족장 야곱을 통해 그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라는 보증을 받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 일행을 맞으며 병상에서 몸을 일으킨 야곱은 잠시 지난 날을 회고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과 벧엘 언약을 요셉에게 전하는 계승의식이었습니다. 이후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창 48:5)


이는 “나는 그들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은 나로부터 재산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The Living Bible)라는 의미였습니다. 요셉이 바랬던 바와 같이 애굽인의 피가 섞인 두 아들이 아버지의 집안,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것이라”는 야곱의 선언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한 의구심을 말끔히 제거해 주었습니다. 훗날 가나안 정복 후 땅의 분배시에 그 어떤 이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 대해 의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음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손자들을 축복하는 야곱의 모습에 요셉이 불편함을 표합니다. 눈이 어두운 그의 아버지를 배려하여 오른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왼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올리시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가 손을 엇바꾸어 얹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비롯해 이스라엘 전통 속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창조의 권능을 표시했기에 요셉은 오른손의 축복을 장자인 므낫세에게 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생태적인 장자냐, 차자냐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의 눈으로는 둘을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그 자신이 먼 이전 또 다른 에브라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서열을 따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차자가 장자가 될 수 있고, 장자가 차자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된 이가 나중될 수 있고, 나중된 이가 먼저 된 이가 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운명론적으로 타고나고, 정해지는 숙명적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안에서 어떻게 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으로


1656년경에 그린 렘브란트의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은 창세기 48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야곱이 누워있는 침실인 동시에 병상인 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침대를 중심으로 걷혀진 커튼과 그 아래 사람들이 삼각형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매우 안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모두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환자복 같은 흰옷을 입은 147세의 야곱은 침대에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살짝 뒤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얼마나 그가 노쇄했는지, 기력이 다해가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움푹 들어가 음영이 져 있는 그의 눈은 시력이 좋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있는 힘껏 손을뻗어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 향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옆에는 고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모자를 쓴 요셉이 아버지의 드리워 진 손 아래 아들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살짝 뜬 눈을 아래로 내려다 보는 요셉의 모습이 아버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맨 오른쪽에는 요셉의 아내인 이집트 사제 보디베라의 딸이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엄마인 아스낫이 두 손을 포갠 채 아이들이 축복받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입은 검은 색 옷은 머지않아 시아버지의 장례가 진행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등장인물 2명은 축복받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장남인 므낫세는 할아버지 곁에 더 다가가 있지만, 할아버지의 오른 손은 더 먼쪽에 있는 동생 에브라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맘이 불편했는지 므낫세는 두 눈을 치켜 뜬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이 할아버지의 손이 아니라, 그 손 아래 있는 동생이라는 사실이 맘을 짠하게 만듭니다.


동생 에브라임은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손을 다소곳이 모아 가슴에 올려 놓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마음을 다해 이 예식에 임하고 있는지 보여 집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마치 자신을 향한 축복기도의 내용에 자신이 얼마나 합당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감당키 어렵지만, 따르겠다는 순종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는 마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하던 천사를 향해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며 순종한 마리아의 고백처럼 다가옵니다.




삶 속으로


죽음을 앞둔 인디언들이 예부터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들이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에 녹아들고,

모든 잡념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렇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겠는가!


이 노래엔 죽음을 바라보는 어떤 공포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되려 때가 되어 맞이하는 죽음을 담담하게 환영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엔 부활과 같은 강렬한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엔 편안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 얍복강가의 브니엘의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의 마지막을 그린 렘브란트의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을 보며 야곱이 삶을 바라봤던 다음의 세 가지를 마음에 담아봅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과 복이 인간의 관점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나름의 규칙을 부여하며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야곱을 택하시고, 에브라임을 세우시듯이 우리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길로 섭리해 가십니다. 강을 따라 버려진 한 아이를 지도자로 삼으시고, 일꾼들이 쓰다남은 버린 돌로 머릿돌을 삼으십니다. 가장 낮은 이들을 하늘 높이 올려서 하늘 아래 모든 권세를 부끄럽게 하십니다(‘그의 나라 온 땅에’ 중에서).


야곱이라는 버려진 돌을 이스라엘이라는 성전의 머릿돌 삼으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그 같은 방법으로 이 땅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세워가십니다.


둘째, “… 내 것이라”는 선언의 의미입니다.

이사야 43:1은 “내 것이라”는 야곱의 선언에 대한 부언처럼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를 지명하여(꼭 집어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우리를 지키시겠다(사 43:2) 하십니다. 낮의 해가 상치 않도록, 밤의 달이 해치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겠다(시 121:6)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이들, 사랑하는 자녀를 이렇게 지키십니다. 이것이 “내 것이라”는 선언에 담긴 약속이요, 보장입니다.

셋째, 미래를 위한 소망이 되는 삶과 죽음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눈 먼 야곱은 시력 좋은 요셉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생래적 순서를 넘어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오른 손을 얹고 하나님께 복을 구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말씀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는 말씀의 실재증인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마지막 까지 소망을 던진 사람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습니다.

  • 창 48:21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야곱은 남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의 인도를 상기시키며,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품게 했습니다. 그의 유언을 받은 요셉 또한 언젠가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 갈 때에 자신의 유골을 반드시 가져갈 것을 유언했습니다. 그 결과 출 13:19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앞둔 토요일 아침…

렘브란트의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을 바라보며 마주하는 한 사람. ‘야곱’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로 마무리했던 바로 그 사람.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시작하여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분.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에 시선이 머물다 그 시선의 빈약함에 몸부림 치는 사순절 아침.



소의 걸음



<렘브란트,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 유화, 1656년>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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