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사순절 33일 움오름 묵상

2019년 4월 22일 업데이트됨


묵상의 말씀
  • 창 43: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 창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성경 속으로


시므온을 볼모로 애굽에 남겨둔 채 가나안으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애굽에서 갖고왔던 양식이 거의 떨어졌습니다. 몇해 째 지속된 기근에 살아남기 위해선 당장이라도 곡식이 있는 애굽으로 가야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동반하지 않은 애굽행은 헛된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돌이키려 해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20여년전 요셉을 잃은데다 시므온까지 애굽에 잡혀있는데, 막내까지 데려가겠다니 야곱으로서는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다시 잃는다면 더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짙어오는 기근의 그림자 앞에 장막 안 식솔들의 한숨소리는 더 해 갔습니다. 자녀들의 수심어린 얼굴에서 야곱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시 애굽으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라라”고 아들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때 유다가 애굽총리가 자신들의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시므온도 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다시는 양식도 구할 수 없다고 경고했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아버지의 마음이 순간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유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창 43:9 제가 베냐민을 위하여 담보가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십시오. 제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다시 데려오지 아니하면 영원히 그 죄를 지겠습니다


과거의 쓰라린 기억과 현재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 침통해 하는 아버지를 유다가 설득했습니다. 자신이 담보가 되어 동생을 끝가지 책임지고 보호하겠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셉을 애굽에 팔자고 형제들에게 제안하며 설득했던 유다가 이런 말을 하다니 뜻 밖입니다. 물론 그걸 듣는 아버지 야곱은 알 길이 없었지만, 그 주변의 형제들이나, 창세기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변화입니다. 도대체 요셉을 팔고 난 후 20여년 동안 유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요셉이 사라진 집에서 유다는 더이상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홀로 집을 떠나 가나안 사람들의 도시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는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았을 뿐 아니라, 맏아들 엘도 가나안 여인과 혼인시켰습니다. 그런데, 맏이가 결혼한지 1년 만에 죽는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어 당시 풍습(계대혼인)에 둘째 아들 오난과 부부가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오난마저 연이어 죽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인생의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자’라는 낙인까지 안겨 주었습니다.


두 아들까지 잃고 보니, 셋째 아들은 어떻게 해서든 보호해야 했기에 며느리 다말에게 줄 수 없었습니다. 말로는 며느리에게 친정에 가서 셋째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건 말일 뿐이었지 지키고픈 마음은 1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유다의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다는 친구와 함께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내려갔습니다.


시아버지의 딤나행 소식을 듣자 다말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평생 홀로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편의 집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나임 성문앞에서 창녀 행색을 한채 시아버지를 기다려 그와 동침했습니다. 이후 3달 뒤 며느리 다말의 임신소식이 들려오자 유다는 며느리의 부정을 심판하며 불 태워 죽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 다말이 자신을 잉태케 한 사람의 증표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보이자 그는 다말이 자신보다 옳았다고 인정합니다. 그 다말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아이 베레스의 계보를 따라 예수님께서 훗날 이 땅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구원사의 한 부분입니다.


다시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간청하는 장면으로 되돌아 가 보겠습니다.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며 베냐민을 보내달라는 유다의 말에 야곱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자신의 아들 유다는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먼저 보내야 했던 그 통한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분명 본인의 말대로 그 자신이 담보가 될지언정 베냐민을 다시 되돌아 오도록 약속을 지킬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에 야곱은 비로소 허락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창 43:13-14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책임지는 유다의 사랑 앞에서 움추렸던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렸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 더 깊어진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놓는 아들 유다 앞에서 야곱마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림 속으로


렘브란트의 <베냐민을 떠나보내는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아들들을 2번째 애굽으로 떠나 보내는 야곱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은 목탄이나 연필을 사용하여 형태와 명암을 위주로 단색으로 표현했습니다. 마치 농담을 조절한 우리나라의 수묵화 같은 깊음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이를 보내야 하는 슬픔이 농밀하게 베여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림 중심부를 사이에 두고 우측엔 어두움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엔 엷은 빛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떠나가고 보내는 이의 마음이 표정 속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명장치 같습니다. 그림의 왼쪽엔 한 여인이 고개숙여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 있습니다. 그녀 아래 있는 강아지는 사실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우측엔 한 사람이 여행 짐을 챙기며 부지런히 나르고 있습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떠나자고 재촉하는듯 보입니다. 그 윗쪽 창문엔 근심어린 눈빛으로 내려다 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번 애굽행이 쉽지 않다는 것을 가족들 모두가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림의 좌측이면서도 구도의 중심에 자리잡은 모자 쓴 노인은 아버지 야곱입니다. 노구의 몸에 걸친 옷 위 드리워진 깊은 주름은 고단했던 생의 골짜기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는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며 맞은 편 사람에게 무언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절절했는지 반쯤 들어올린 그의 오른 손이 그 간절함을 대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 아들의 어깨 위에 감싸듯이 올려놓은 그의 왼손은 아직도 안심이 되지 않아 보내고 싶지 않으나 차마 보낼 수 밖에 없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야곱의 맞은 편에서 듣고 있는 '긴 막대기를 가진 남자'는 유다입니다. 그는 목자의 막대기에 살짝 기댄 채 오른 손에는 굵은 줄 같은 것을 쥐고 있습니다. 한때 그가 다말에게 담보로 맡겼던 물건(지팡이와 끈) 같아 보입니다. 다시 찾은 담보물을 든 유다는 이제 자신이 담보가 되어 어린 동생을 반드시 되돌아 오게 하겠다며 아버지 앞에 서약하고 있습니다. 뒤돌아 서 있는 그의 표정이 사뭇 궁금하지만, 볼 수 없음으로 더 많은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삶의 질곡을 알고,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는 아픔을 아는 유다였기에 굳이 많은 말과 표정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을 겁니다.


야곱의 한쪽 품 아래 있는 베냐민은 아직도 한참 더 보호자의 날개 그늘이 필요한 가냘픈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중 막내인 탓도 있겠으나, 여전히 아버지의 양육을 받아야할 소년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 때문일 겁니다. 그런 베냐민을 앞날이 불확실한 애굽으로 떠나보내야 하니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을 겁니다. 그 아들을 떠나보내며 먼저 보낸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아들 요셉, 그리고 애굽에 볼모로 잡혀있는 시므온이 한꺼번에 떠올라 더더욱 가슴이 아려왔을 겁니다.


그런데, 그림 속에 의외의 한 인물에 계속 시선이 갑니다. 그는 야곱과 유다 사이에 모자를 쓰고 있는남자입니다. 그의 입은 무겁게 닫혀 있고, 그의 발은 차렷자세에서 살짝 벌어진 모습으로 굳게 서 있습니다.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 그의 시선이 참 짙습니다. 마치 이 헤어짐, 이 슬픔을 익히 알고 있다는 듯 그는 말없이 그저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표정이 이제껏 보았던 렘브란트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렘브란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별의 골짜기를 수시로 드나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이별의 쓰라림을 통절하게 겪었던 남편이었습니다. 여섯 명의 자녀 중 딸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울부짖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이별의 슬픔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베냐민을 떠나보내는 야곱>이라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사랑하는 자식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 43:14)


어쩌면 이 그림이 화려한 여러 색조로 표현되었다면, 지금 느끼는 잿빛 아픔에는 다가서지 못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단색으로 슬픔의 농도를 조절했기에 통절한 그 절규와 한탄이 더 깊게 전해집니다. 골 깊은 산일수록 그 울림이 더 묵직하게 산줄기를 타고 올라오듯이 이별의 아픔을 찬찬히 삭여가던 이들의 슬픔이 하늘로 번져 갑니다. 아버지 야곱의 슬픔과 그 슬픔을 아는 아들 유다의 슬픔,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슬픔.




삶 속으로


렘브란트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빼먹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물의 해부학이나 원근법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성경 속 이야기의 본질을 자신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또 인물들을 좀더 깊이 있게 나타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싶습니다. 렘브란트 그는 성경의 사건을 단순히 진술하듯이 그린 것이 아니라, 마치 현장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는 성경의 속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비춰보길 원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그림 속에서 그 어떤 달변의 설교자에게서 듣는 것보다도 더 깊은 영성을 느끼고 진한 감동을 받는 것이 이같은 그의 묵상이 녹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라헬과의 사별, 그리고 자식들과 이별할 때 겪은 아버지 야곱의 절절한 사연을 그의 이야기로 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듣는 야곱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렘브란트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나아가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무렵 세찬 겨울비 같은 봄비가 내릴 때 421번 시내버스를 타고 용산 국방부청사 앞을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차창 밖을 내다보다 낯설지 않은 광경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군에 보낸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해 달라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 울부짖음이 차가운 빗줄기가 되어 차창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이 낯설지 않다는 것은 이와 같은 아픔으로 울부짖는 분들의 통한이 여전히 이 땅 곳곳에 서려있기 때문입니다. 70년전 3만명의 가족을 잃은 제주도민들, 38년전 5,189명의 가족들을 잃은 5·18 광주 민주화 유가족들, 5년전 304명의 부모와 자녀들을 실시간 생방송을 보듯이 보내야 했던 가족들, 그리고 각종 산업현장의 재해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 울부짖는 가족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고, 또 잃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아들을 보내는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 이분들의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림의 어떤 부분은 짙고, 어떤 부분은 옅은지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눈물로 먹을 갈아 채색한 삶의 수묵화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가 사월을 잔인한 달이고 했던가요?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뒤섞은 봄비가 메마른 뿌리를 뒤흔드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며 마른 뿌리로 작은 목숨을 부지시켜 주셨던 분의 손길이 붙들고 있는 한 그것은 잔인한 달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꽉 움켜 쥐었던 손을 펴고 검은 색으로 채색된 세상의 한 부분으로 보낼만한 용기를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러고 보니, 야곱의 이 선언은 과거의 아픔으로 인한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에스더가 드린 기도의 원형이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그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이들의 절박한 응전력이자 끝내 놓지 못하던 삶의 집착마저 내어 놓는 맡김의 기도였습니다.


죽음의 길로 자녀를 떠나보낸 이 땅 부모들의 눈물을 보는 아침, 그 눈물 속에 당신의 아들을 해골언덕, 골고다로 내보내는 하늘 아버지의 눈물을 보는 사순절. 그리고… 죽음에 맞서는 삶의 절박한 응전력으로 일어서는 은혜의 아침입니다. 스스로 담보가 되어 책임지는 유다의 사랑 앞에서 움추렸던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을 향해 열립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상처를 통해 더 깊어진 사랑으로 언젠가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소의 걸음



<렘브란트, ‘베냐민을 떠나보내는 야곱’, 소묘, 1650년, Haarlem Teylers Museum>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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