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사순절 32일 움오름 묵상

2019년 4월 22일 업데이트됨


묵상의 말씀
  •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창 32: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창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성경 속으로


야곱의 재산이 점점 늘어나자 라반의 아들들이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야곱이 자기들의 아버지 재산을 빼돌려 거부가 되었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얼굴을 보니, 그의 안색 또한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불안이 찾아 왔습니다. 불안의 두 손을 초조함이 꼭 잡았습니다. 소유가 늘어난 것만큼 지켜야할 것도 많아졌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걱정 가운데 있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조상의 땅, 너의 친족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말씀에 따라 야곱은 처자식과 가축들을 이끌고 떠나온 고향을 향했습니다. 고향을 떠난지 20년만의 귀향이었습니다. 밧단 아람에서의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곧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서 있을 때였습니다. 자신에게서 장자권을 사기당하고, 아버지의 축복까지 빼앗겼던 형이 지난 20년 동안 가슴에 품어온 원한을 풀기 위해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걸 어쩌지?…’ 무섭고도 초조한 발걸음을 딛던 야곱에게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묘안이 생각났습니다. 물질적 보상을 통해 형의 마음을 돌리면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일명, ‘선물작전’. 하지만, 말이 선물작전이지 영락없는 뇌물작전이었습니다. 뇌물 목록이 화려합니다. <암염소가 이백, 수염소가 이십, 암양이 이백, 수양이 이십,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 암소가 사십, 황소가 열, 암나귀가 이십, 그 새끼가 열>

이것은 그만큼 형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고의 좋은 선물을 준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직도 야곱이 인생이 그 자신의 손에 있는 줄로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뇌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야곱은 더 안전한 방도를 마련했습니다. 얍복강 나루에 도착한 뒤 식솔들을 세 부분으로 나눠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선물 다음으로 가장 먼저 에서에게로 나아가는 1진은 부인들의 몸종이었다가 후처가 된 이들과 그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나아가는 2진은 라반에게 속아 결혼한 레아와 그 자식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거리를 두고 나아가는 3진은 가장 아끼는 라헬과 그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자신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던지 야곱은 강을 건너지 않은 채 홀로 얍복강 나루에 남았습니다. 이걸 보니, 참 사람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책임 있는 남편이요, 아버지라면 본인이 가장 먼저 강을 건너가 형 앞에 엎드리어 이렇게 빌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은 죽여도 좋으니, 제발 가족들만은 살려달라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다음 날을 걱정하던 야곱은 그날도 그렇게 초이기적인 존재로 밤을 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로 남은 그 얍복강가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지난 날의 과오와 실패로, 그리고 죄악으로 인해 몸부림치던 그를 찾아오시어 싸움을 거셨습니다. 야곱이 만든 상황 속으로 찾아오셔서 삶의 주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얍복’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그 밤은 야곱에게 온통 비우고, 털어버리고, 쏟아내는 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꾀로 세워왔던 인생을 철저히 비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비움 속에 비로소 오랫동안 야곱의 얼굴을 덮었던 위선의 가면이 벗겨졌습니다. 그의 삶에 자유가 찾아오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밤새도록 천사와 인생의 주도권을 놓고 줄다리기 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요구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야곱의 의지간의 충돌은 야곱이 이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몸의 상체와 하체의 연결고리가 되는 뼈를 내리치시는 순간 야곱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재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끝내 놓지 못하던 인생의 주도권이 포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끝내 매달리며 눈물로 간구하는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은 바꾸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 그것은 평생 남의 발꿈치를 잡고, 속이고, 빼앗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야곱의 자기고백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 ‘이스라엘’… 그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은 자, 하나님께 굴복되어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존재라는 의미였습니다.


얍복 강가의 그 긴긴 밤의 싸움이 끝나자 성경은 지난 밤의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지관절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31)


온 몸이 흙과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맞이했던 그날 아침의 태양은 어제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눈이 부셔 도저히 쳐다볼 수 없던 빛이 아니라, 위골된 장애를 안고 절룩거리며 형에게로 나아가던 그를 뒤에서 감싸주는 은총의 빛이었습니다. 그것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끝까지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던 야곱을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이었습니다.


*참고: 2019년 1월 27일 움오름설교 백호성P의 <이스라엘>



그림 속으로


야곱과 천사(하나님)가 다투며 씨름하는 모습을 렘브란트는 다른 화가들과는 사뭇 다른 접근법을 갖고 묘사했습니다. 여타의 작가들이 두 존재간의 다툼의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하는데 집중했다면, 렘브란트는 두 인물의 물리적 특징 보다는 심리적 묘사에 더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얼굴표정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가 1660년경에 그린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보면 야곱과 천사가 씨름하는 장면을 단순하게 그리지 않고, 그 속에 그의 성경묵상을 담았습니다. 그는 두 인물의 표정을 통해 그가 받았던 성경 속 감동을 심리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그를 속박하고 지배했던 장인 라반에게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형 에서를 만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중독에서 벗어나는가 하면, 또 다른 중독에 속해지는 것처럼 그는 또 다른 속박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온전히 과거 그가 저질렀던 행위의 결과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한번 맞닦드려야 함을 알았지만, 이렇게 다가올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그의 이런 두려움과 절박함이 야곱의 표정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과거처럼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내야 겠다는 그의 간절함 또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다시 보니,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기결수처럼 온갖 수심에 젖어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천사를 붙들고 있습니다. 자신을 축복해 주지 않는다면 결코 놓지 않겠노라며 흐느끼는 그의 절절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건장한 야곱과 씨름하는 천사의 표정이 여타 경우와 달라 매우 의외였습니다. 천사의 얼굴엔 고단함이 없습니다. 밤새 달라붙는 야곱을 떨쳐내느라 힘을 쓴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얼굴엔 땀도 흐르지 않고, 힘을 쓸때 드러나는 힘줄 하나도 서 있지 않습니다. 천사는 그저 괴로운 표정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야곱을 애처로이 내려다 보고 있을 뿐입니다.


승패는 이미 끝이 난 것 같습니다. 천사는 편안한 표정으로 서 있지만, 야곱의 얼굴은 체념한듯 몸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사는 오른 발을 들어 야곱의 옆구리를 가격하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팔로 야곱을 감싸안고 있습니다. 묘하게 느껴지는 이중성… 그러고 보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야곱과 천사의 대결이 아니라, 그저 죽어가고, 힘들어 하는 야곱을 천사가 살리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 같게도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습니다. 왜 렘브란트는 야곱이 입은 옷을 붉은 색으로 표현했을까요? 또 전체적인 분위기를 왜 엷은 붉은 빛으로 채색했을까요? … 렘브란트가 붉은 계열색을 좋아했으니까라고 답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아니겠지만, 괜히 자꾸 그 색에 눈길이 갑니다.


어쩌면… 지금 천사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 야곱인 동시에 에서임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평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가지려 했던 야곱임과 동시에 억울함과 분함으로 20년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하나님 없이 살아온 붉은 몸의 사람 에서 말입니다. 한 날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던 쌍둥이. 다른 것 같지만 영락없이 닮은 사람. 둘 모두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려 했던 공통점을 지녔던 사람. 바로 그 두 사람 모두가 한 사람 안에서 지금 괴로워 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장면은 아닐까요?


야곱이 입은 붉은 옷, 덥수룩한 수염, 굵은 근육질의 몸매… 20년전 그가 염소를 잡아 그 털을 바르고, 형의 옷을 몰래 입은 채 아버지 앞에 섰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토록 되고자 했던 그 형의 모습으로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20년 전과는 달리 그 형의 심정으로 아파하며, 그 형이 되어 지난 날의 기만과 과오에 흐느끼고 있

습니다.


그러고 보면, 얍복강가의 야곱과 천사와의 싸움은 야곱과 천사만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끝내 용서를 구하지 못했던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야곱이 그 형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섰던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더 깊게 드러내기 위해 렘브란트는 씨름과 싸움이라는 만남의 형식에서 천사의 모습을 따스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아마도 천사를 산모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야곱도 아닌, 되고자 했던 에서도 아닌 하나님께 기댄 사람 이스라엘을 낳았던 모성의 하나님 말입니다.




삶 속으로


야곱의 인생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인생이었습니다. 나와 닮았으나 나와 달랐던 형 에서처럼 강하게 살기 위해 싸우며, 빼앗으며, 쟁취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요, 처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증명이라도 하듯 온 힘으로 움켜쥐며 달려왔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얍복강가 그 캄캄한 밤에 홀로 남겨진 그에게 던지셨던 하나님의 질문은 지금까지 그러한 삶의 정당성을 깊이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에 흥분하며, 무엇에 좌절하며 무엇에 분노했는지 지난 삶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삶의 내밀한 곳에서 자꾸만 삐거덕 거리던 그 소리는 그의 삶이 말해주는 존재, 그 이름을 직면하게 했습니다. 분노, 위선, 거절감, 자기증명, 중독, 메마름, 외로움, 독선, 실패자, 나약함, 두려움, 열등감, 초라함… 그 밤 야곱이 자신의 삶을 지배해 왔던 본인의 이름을 생각했듯이, 오늘 우리 이름을 생각해 봅니다.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물으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누구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얍복강 나룻터에서 밤이 새도록 과거부터 켜켜이 쌓아왔던 문제를 안고 하나님과 직면했던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사순절 아침.


우리 이름이 더 이상 내 의지로, 내 힘으로 일어서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댄 사람,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이기를… 평생 거룩과 세속의 경계선에서 절묘한 외줄타기를 하던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울어진 이스라엘이기를… 아버지를 속이며 그렇게도 되고자 했던 에서로서의 야곱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을 잃은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로 살아가기를…


오늘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 브니엘, 하나님의 그 얼굴빛으로 빛나는 날이기를 구합니다.


  •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소의 걸음



<렘브란트,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유화, 1660년>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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