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사순절 28일 움오름 묵상

2019년 4월 22일 업데이트됨


묵상의 말씀
  • 삿 16: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 삿 16: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성경 속으로


성경 속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힘이 세었던 용사는 단연 삼손입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까지 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아킬레스의 발목 뒷부분 힘줄(아킬레스건)처럼 가장 강함과 가장 약함을 동시에 안고 있었습니다. 천사의 수태고지와 함께 태어난 그는 분명 남다른 소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지만, 자기의 힘만큼이나 그 힘을 다스리고 조절할 힘을 연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이야기는 마냥 아름답지만 않습니다. 20여년간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던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13장-16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사사기의 진술에 의하면 삼손은 사자의 입을 두 손으로 찢어 단숨에 숨통을 끊어 버릴 정도의 괴력을 지녔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자 턱의 악력을 꺾고 그 입을 찢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당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상대할 정도로 그는 토르, 캡틴 아메리카를 모두 합친 울트라 어벤저스였습니다.


그는 ’나실인’, 날때부터 하나님께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천사가 그렇게 고지했고, 그에 따라 부모도 그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물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생을 드린 운명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에게는 몇 가지 지켜야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여타의 나실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독한 술과 부정한 음식을 피하고 주검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이건 기본이었습니다. 이것 외에 삼손에겐 특별한 금기사항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머리카락을 절대로 자르지 않아야 하는 것!


그렇지만,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금기사항은 깨어지기 쉬운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그게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조국 이스라엘과 적대국이었던 블레셋 여인 들릴라를 미치도록 사랑한 삼손은 그녀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에 이릅니다. 은 천 개에 매수된 들릴라가 삼손을 잠재우자 적들은 그의 머리카락을 베었습니다. 힘을 잃은 삼손은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두 눈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적국의 포로가 되어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옥에 갇힌 삼손의 머리털이 점점 자라기 시작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지난 날의 과오를 통회하던 삼손은 다곤에게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결심합니다. 곁에 있던 소년에게 부탁하여 신전을 지탱하고 있는 두 기둥을 찾은 그는 하나님 앞에 생전의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 기둥을 흔들었고 신전은 곧 무너졌습니다. 성경은 그저 담담하게 삼손이 이때 죽인 사람의 수가 살았을 때 죽인 사람의 수보다 많았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림 속으로


렘브란트는 삼손의 생애를 연작( 1628년에 <삼손과 들릴라>, 1635년에 <장인을 위협하는 삼손>, 1636년에 <삼손의 실명>, 1638년에 <삼손의 혼인>)으로 남겼습니다. 그 중 이 그림은 1636년의 작품으로서 들릴라의 속임수에 빠져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을 잃게 되는 장면을 가장 참혹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들릴라의 손짓 신호에 따라 일련의 병사들이 들이 닥칩니다. 왼쪽 부분에 터키 복식을 걸친 병사는 미늘창(halberd)으로 삼손을 겨누고 있습니다. 병사 하나가 삼손의 등 뒤에서 해드락을 하듯이 목을 옥죄며 끌어안고 있습니다. 다른 병사는 삼손의 오른 팔을 사슬로 묶고 있습니다. 그때 단검을 쥔 병사가 왼손으로 삼손의 목덜미를 누르며 오른손으로 삼손의 눈을 찌릅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삼손의 발가락이 독수리 발톱처럼 웅크러집니다. 이렇게 적극 체포에 가담하는 병사들과는 달리 뒤에서 칼을 들고 있는 병사는 겁에 질려 있습니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서 칼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은 들릴라를 지나 차가운 뱀의 혓바닥처럼 삼손의 고통을 훑어 내립니다.


사사기는 삼손이 체포되던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 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에 누이고 잠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삼손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게 한 뒤, 그를 건드리고 나서 힘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들릴라가 삼손에게 소리쳤습니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을 왔어요!” 삼손은 잠에서 깨어나 ‘전처럼 힘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삼손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삼손의 두 눈을 뽑은 뒤, 가사로 데려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구리 사슬로 묶어 감옥에 넣고, 곡식을 갈게 만들었습니다. (쉬운성경, 삿 16:19-21)

렘브란트는 이 부분의 극적 효과를 위해 그림속의 내용을 조금 각색했습니다. 들릴라는 다른 사람을 불러 머리털을 자르지 않고, 직접 삼손의 머리털을 잘랐습니다. 그녀의 오른 손에는 가위가 들려 있고, 왼손엔 이미 잘려나온 삼손의 머리털이 바람결에 흩날립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 밖으로 향하는 그녀는 묘한 웃음을 띈채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를 응시합니다. 마치 그녀의 손에 쥔 머리카락이 삼손의 것이 아닌 우리의 머리카락임을 말하며 놀리는 듯한 묘한 시선입니다.


잘려나간 머리카락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떠나갔습니다. 그의 엄청난 힘도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그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칼에 찔린 그의 눈에서는 피가 튀기고 그 핏줄기가 이마에까지 흘러 내립니다. 그는 두 주먹은 움켜 쥐었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독수리의 발톱처럼 오그라든 그의 오른쪽 발가락은 들릴라를 향합니다. 이런 삼손의 모습은 마치 루벤스가 그린 <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신 재주와 능력을 허비한 사람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들려주는 듯 합니다.

그런데, 삼손의 처참한 모습을 재현한 이 그림은 곧바로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렘브란트는 그림이 완성된지 3년 후인 1639년에 호이헨스 (Christiaan Huygens, 1629-1695)에게 이 그림을 선물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호이헨스는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보름 후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보내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그림을 햇살이 좋은 곳에 전시하십시오.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감상한다면 불꽃이 번뜩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렘브란트는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이미 빛을 상실한 사람에게서도 불꽃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를 빛 아래 둠으로써 어떤 불꽃이 일어난다는 말일까요? 렘브란트의 그림도, 모작도 없기에 컴퓨터 화면을 가장 최대치로 밝게 한 뒤 <삼손의 실명>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렘브란트가 왜 그런 조언을 호이헨스에게 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으로 남습니다. 언젠가 프랑크푸르트에 갈 일이 있다면, 어느 햇살 좋은 날 Städel Museum에 가봐야 겠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그 그림을 바라보다 문득 불꽃이 번뜩이기를 바라며…


그런데, 렘브란트에게 참 외람되게도 제겐 <삼손의 실명>이 눈이 멀어 참혹해지는 비극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깎여진 머리카락, 웃옷이 벗겨져 맨살이 드러난 몸, 잔뜩 움크리고 있는 그의 발모양… 이런 모습이 마치 영락없이 모태에서 태어나는 아기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심지어 둘러싼 병사들은 산파로 보이며, 가위로 자른 삼손의 머리카락을 들어보이는 들릴라는 탯줄을 잘라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사람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발칙한 상상을 해봅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 현장은 삼손이 새로이 태어나는 현장인지도 모른다고요.


머리카락이 잘려지고 새로운 머리카락이 나듯이, 삼손은 그렇게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눈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진짜 눈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눈을 잃고서야 비로소 참된 빛을 볼 수 있었고, 그 빛으로 인해 걸어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삶 속으로


삼손의 이야기는 마치 팥죽 한그릇 때문에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팔아 넘긴 에서를 연상케 합니다. 날 때부터 받은 장자의 자격과 존엄이 인간의 욕망에 무릎 꿇음으로써 어이없게 상실한 어리석음의 전형. 또한 삼손의 이야기는 장점이 불행과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랑이었던 긴 머리카락 때문에 잡혀 죽었던 압살롬처럼, 삼손의 실패도 그의 장점인 강한 힘 때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진짜 원인은 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한국인들은 조그마한 시비가 붙어도 '내가 누군줄 알아?'를 남발한다고.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끝임없이 상대에게 묻고 답하는 대단한 철학적 민족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본질적인 나'가 없이 살기에, 자신의 '존재'가 아닌 소유와 경력과 인맥으로 자신을 정의하기에 '내가 누군줄 알아’라는 얼토당토 않는 물음을 거들먹거립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삼손은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이 소유한 힘으로 규정된다고 믿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에 의해 바쳐진 그의 삶은 주체적인 삶도, 자유의 삶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자아'가 빠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그 삶을 이방 여인의 품 안에서 확인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배반 당함으로 버려졌습니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뽑혀진 두 눈처럼 모든 것이 끝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삼손의 이야기는 무너진 인간이 용도폐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다시 거듭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 욕망의 신전 두 기둥을 부둥켜 안고 쓰러짐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영적 역사가 세워지는 지를 말해 줍니다. 그는 잃어버림으로써 찾았고, 죽음으로써 다시 살았습니다. 이 기가 막힌 패러독스의 드라마를 삼손은 이런 기도로 시작합니다.

  • 주 하나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한 번만 더 힘을 주십시오.(쉬운성경, 삿 16:28)


새롭게 태어난 그가 드리는 이 반전의 기도에 앞서 성경은 미리 그 반전의 서막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2)


사순절은 이런 반전의 서막입니다. 존귀하신 분이 당신을 주심으로 비천한 자들을 얻으셨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잃어버림으로써 뭇생명을 찾았고, 보지 못했던 것이 진정으로 보게 되는 반전의 역사였습니다. 이 반전의 역사를 오늘 아침 렘브란트를 통해 봅니다. 드리워진 구름층을 뚫고서도 스며드는 아침 햇살에 불꽃이 번뜩이는 이 패러독스…



소의 걸음



<렘브란트, 삼손의 실명, 1636 Oil on canvas ㅣ 206 x 276cm Städel Museum, Frankfurt am Main, Germany>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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