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오름교회

2021.05.23 움오름 주일 설교 - "여호와의 궤"(삼상 4:1b-7:2)

2021년 5월 24일 업데이트됨

삼상 4:1b~7:2

4장

1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2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4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12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13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14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15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16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19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20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5장

1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2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3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4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5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6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7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8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9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10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11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12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6장

1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2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3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4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5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6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7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8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9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10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11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13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14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15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16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17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18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19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20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21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7장

1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2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설교문

1. 법궤 피탈사건

오늘 본문은 지난주일 살펴본 사무엘의 소명과 다음주일에 볼 마지막 사사 사무엘의 등장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마치 샌드위치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없더라도 사무엘의 사역 이야기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들어 있다면, 그건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무엘 개인으로 보면, 그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엘리의 시대가 가고, 사무엘이 사사가 되고, 제사장이 되고,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이것은 기존의 갖고 있던 신앙이 붕괴되는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법궤피탈사건입니다.

법궤는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언약궤라고도 불리는 법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함께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가시나무의 일종인 싯딤나무를 조각조각 붙여서 만들고 그 안과 밖을 금으로 감쌌습니다. 가로 125㎝, 세로 75㎝, 높이 75㎝입니다(앞에 있는 성찬탁자와 크기가 유사합니다). 법궤 위엔 날개를 편 두 천사 모양을 한 시은좌라고 불리는 뚜껑이 있었습니다(*사진 참조).

이 법궤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과 동행했고, 가나안에 들어올 때도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가장 앞서 인도했던 여호와 신앙의 상징이었습니다. 가나안 정착 후에는 법궤가 있던 실로가 예배중심지임과 동시에 수도역할을 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향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략 350여년 동안 이스라엘이 바라보고, 의지하던 신앙의 중심을 상실했으니 그게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이 시간엔 빼앗긴 법궤를 따라서 일어난 사건들과 그 의미를 새겨 보겠습니다.

2. 이가봇

사사시대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며 하나님께 멀어졌을 때 하나님은 주변 민족들을 통해 괴롭게 하셨습니다.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케 하신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4천명의 전사자가 나왔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했어야 합니까? … 당연히 자신들을 돌아 봐야했고, 얼른 회개모드로 전환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3절에 기록된 이스라엘 장로들의 반응은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장로들은 자신들과 이스라엘이 자행한 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블레셋을 이기도록 해주지 않으셨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패배의 이유인데도 엉뚱한데서 원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부터 이방신을 섬기는 풍습을 따르며 우상숭배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 주시고, 복 주실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이 자신감의 출처가 사뭇 궁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각한 패배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실로에 있는 법궤를 가져와 자신들의 패배를 만회하려 했습니다. 법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뜻이 머무는 거룩한 상징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었습니다. 행운의 부적처럼 원하고 필요로 할때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옳은 길로 권면하고 중보해야 할 어른들인 장로들의 수준이 이러하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장로들의 요청을 받은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아무 생각없이 법궤를 옮겨 블레셋과의 전쟁자리로 왔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이르자 백성들은 환호하고 열광했습니다. 이제 이겼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소리가 얼마나 큰지 상대편 진영에서 듣고 근심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모습은 우리의 헛된 예배행위를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 자기 만족에 흥분하고 감동하는 오늘날의 감성예배가 겹칩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은혜로운 예배입니다. 내 맘에 감동이 없으면 실패한 예배입니다. … 하나님이 어떻게 받으셨는가? 그분의 관점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중심된 예배입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자기 확신에 충만했던 이스라엘은 대패했습니다. 보병 3만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습니다. 앞선 전투보다 거의 8배가 더 많은 전사자였습니다. 참 믿음이 아닌 자기확신에 근거한 유사신앙이 얼마나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패배가 끝이 아니라, 연속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법궤를 옮기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동시에 죽었습니다. 그 소식과 더불어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이 실로에 있던 엘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들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지난 350여년간 이스라엘과 함께 했던 법궤의 피탈소식이 엘리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언약궤가 더이상 이스라엘에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너무 놀란 나머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그 자리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98세였습니다. 엘리의 며느리이자 비느하스의 아내는 출산 중에 시아버지와 남편의 부고를 듣고 진통 중에 죽었습니다. 죽기 전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삼상 4:22은 그 뜻이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의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엘리의 며느리는 자기 집안의 몰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의미에서 이가봇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관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엘리의 집안이나 법궤의 피탈과 상관없었습니다. 되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이스라엘의 혼란한 종교생활을 청산케 하시는 선조치였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을 제거하셔야 했고, 법궤를 부적처럼 이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습과 환상을 깨뜨리셔야 했습니다. 새로운 집을 지으시기 위해 기존의 오래되고 낡은 건물을 허물어 버리는 작업이 우선이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그렇게 하고 계셨습니다.

3. 블레셋과 법궤

삼상 5장은 탈취한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 블레셋 주요 도시들에서 일어난 재앙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백년 동안 전설처럼 전해오던 여호와의 법궤를 전리품으로 챙긴 블레셋의 기쁨은 이루 비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자신들의 주신인 다곤의 신전 신상 앞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들이 사로 잡았던 법궤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 생각했습니다. 법궤는 다곤에게 바치는 전리품이었습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신전에 들어갔던 블레셋 고위직들은 너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들의 신이 대좌에서 떨어져 언약궤 앞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갖다 바친 제물 앞에 그들의 신이 되려 엎드려 경배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들이 힘을 다해 다곤신상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가보니, 더 심각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다곤 신상이 아예 땅바닥에 내던져저 머리와 손목이 끊어지고, 몸뚱이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자신들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 엄청난 혜택을 줄 줄 알았는데,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간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에 돌려줄 수도 없는 일이라 그들은 얼른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승리와 자부심의 상징이었던 전리품 법궤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계속 떠넘겨졌습니다. 법궤가 가는 성읍마다 전염병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출애굽 전에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악질과 독종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도시들끼리 떠넘기기를 하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블레셋인들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신상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 엎드려지고, 꼬꾸라져 신상이 조각조각난 것을 보았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곳마다 전염병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쯤되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보다 훨씬 여호와 하나님이 권능 있으시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서진 신상을 붙일 줄 알았지, 부서진 신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 분명한 증거들 앞에서도 계속 거짓신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더라면 다곤을 섬기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법궤를 이용해서 승리하고자 했던 이스라엘이나, 그 법궤를 이용해 하나님의 권능을 뽑아내려했던 블레셋이나 모두 실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에 있어 영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도구가 우리 손 안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은 없이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도구와 능력으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4.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암소

블레셋 방백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모아 법궤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이것이 법궤를 탈취해 온지 무려 일곱 달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일곱 달 동안 갖은 고초를 다 겪었던 제사장들은 2가지를 제안했습니다. 하나는 돌려보내되 그냥 돌려보내지 말고 블레셋의 주요 다섯 도시를 의미하는 5라는 숫자에 맞게 독종과 쥐형상을 금으로 만들어 같이 실어보내자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유사한 것으로 치료한다는 ‘동종요법’(homeopathic)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 일곱 달 동안의 재앙이 하나님의 법궤로 인함인지를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

: 그 시험은 3가지의 조건을 갖춘 시험이었습니다. 첫째, 새수레에 언약궤를 실으라고 했습니다. 법궤에 대한 그들 나름의 존중의 표시였습니다.

둘째, 단 한번도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암소 두 마리로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랐을 적에 코를 뚫어 코뚜레하는 것을 여러번 지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소가 됐을 때 고삐매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부리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 큰 암소 두마리는 그때까지 멍에를 단 한번도 메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코뚜레 없이 자랐거나, 단 한번도 자기 싫은 것을 해 본적이 없이 방목해서 자란 소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소에게 멍에를 씌우면 수레를 잘 끌리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 시험이었습니다.

셋째, 두 마리의 암소는 반드시 새끼를 갓 낳아 젖이 뚝뚝 떨어질 정도여야 했습니다.

: 동물이라도 어미 소는 사람 못지 않게 자기 새끼에 대한 애정이 탁월합니다. 그런 소가 어린 새끼를 두고 수레를 끌고 떠나간다는 것은 본능과 모성을 역행하는 일입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 그럼에도 수레를 끌고 간다면,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믿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런 여러가지의 조건들, 다시 말해 수레를 끌고 가지 않을 조건을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당연히 확인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제사장들의 감춰진 속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심 7개월 동안의 재앙이 우연이기를 바란다는 그들의 욕망이었습니다. 정말 일곱 달 동안 하나님으로인해 블레셋에 재앙이 내렸다면, 자신들이 신봉하고, 백성들로 추종케 했던 자기들 밥벌이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밥벌이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먹고 사는 일은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대자 앞에 자기 생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밥벌이가 우선이라면 이건 분명 큰 문제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는 모든 성도에게 해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밥벌이였던 블레셋의 제사장들을 보며 저는 저의 목회의 길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의 모습을 보며 여러분들의 어떤 모습이 보이십니까?

한번도 메어보지 않은 멍에를 메고, 젖 먹이 송아지를 억지로 떼어낸 두 암소는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향했습니다. 중간에 딤나로 빠질 수 있었습니다.(*그림 참조) 하지만 그들은 울음 한번 내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은 채 이스라엘 접경도시인 벧세메스로 향했습니다. 그 길의 끝이 자신들의 죽음인줄도 모른 채 묵묵히 그 길로 향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고 사랑받은 이스라엘보다 짐승인 소가 더 충성됩니다. 더 신실합니다. 블레셋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데 정작 이스라엘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본류에서 벗어났지만, 옛부터 이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벧세메스로 가는 소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묵묵히 걸었던 소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던 그 사랑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5. 벧세메스 사람들과 기럇여아림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을 추수하다가 두 소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앞에서 고삐를 잡고 끌거나, 뒤에서 채찍질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궤를 실고 오는 장면을 보며 그들은 놀랐고, 환호했습니다. 접경지대에서 늘 블레셋에게 당하고, 빼앗겨서 조마조마하던 그들은 처음으로 승리를 만끽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과 레위인들은 곧장 그 소들을 잡고, 나무 수레를 부숴 하나님께 번제와 희생제를 드렸습니다.

이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블레셋의 다섯 방백이 지난 일곱 달 동안 내린 재앙의 결론을 확인하고 되돌아 갔습니다. 아마 ‘이제 됐다. 끝났다’라고 생각하며 안심했을 겁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끝이었고, 안심할 일이었지만, 이스라엘에는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가까이에서 처음보는 법궤에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불경스럽게도 법궤의 덮개인 시은좌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징벌이 내려 주변에 있던 70명이 즉사했습니다.

이것은 벧세메스 마을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교도인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에 대한 예우로 새수레를 만들어 모시고, 번제와 희생제를 드릴 제물까지 보냈는데, 신도인 벧세메스 사람들은 율법으로 엄격히 금한 법궤를 손으로 만지고 열어서 들여다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과 오락의 대상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벧세메스 사람들의 반응 앞에 하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물론 법궤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계시의 한 방편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도구를 다루는 방법도 하나님이 명하신 법도에 따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설교하던 강대상에 함부로 올라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기도드릴 때 늘 무릎을 꿇고 두손 모아 정성껏 하게 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경건의 모양을 강조했습니다. 지금은 딤후 3:5이 말씀하듯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는 말씀처럼, 능력이 중요하지, 모양이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는 어느덧 경건의 모양마저 상실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경건을 담는 그릇인 모양을 버리니 어디에 능력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바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들을 늘어 놓으면서도 정작 자기초월적인 경건의 모양은 연습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런 하나님의 징벌 앞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과 행위를 수정하는 대신 가장 쉬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만만한 상대에게 법궤를 떠넘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벧세메스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졌고, 예루살렘에서는 12km 못 미치는 산 위 마을인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전령을 보내 이렇게 명했습니다. 삼상 6:21 후반절입니다.

“…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하나님의 법궤는 엘리의 가문을 비롯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재앙에 이어 벧세메스 사람들을 향한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지킴으로써 법궤의 방랑이 끝을 맺었습니다. 삼상 7:2은 2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전까지 전체기간은 7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머물렀습니다.

삼상 7:2의 끝부분이 “이스라엘 온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직역하면, “이스라엘 온족속이 여호와를 슬퍼하니라(또는 애곡하니라)”가 됩니다. 전형적인 사사기의 순환적 회개 패턴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반영해 보면, 앞서 20년 동안이라는 기간은 성인이 된 사무엘에 의해 20년 후 미스바에서 대성회를 가지며 회개하는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6. 성령강림주일에 드리는 기도

오늘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따로 이 의미에 대해서 설명드리기 보다는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인지를 새겨 보셨으면 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유랑했던 이야기를 보며 마음이 무겁습니다. 심판당한 이스라엘의 모습이나 무지한 블레셋의 모습이나 불경한 벧세메스 사람들의 모습과 우리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도가 무너지고, 외면당하는 세상, 타종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에 의해 철저히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불경의 시대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우선시하면서도 정작 그 능력을 담을 경건의 모습은 1도 연습하지 않는 오만한과 교만함이 우리를 두르고 있습니다. 팬더믹 시대, 반드시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릴 필요가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있는 자리에서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처럼 거룩하고 구별되게 하나님을 예배하였는가를 물으신다면, 누가 감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 밖에 서는 자기초월’을 꺼려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더 침투해 오실 수 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 우리 속에 더 들어 오시옵소서. 우리로 더더욱 주님 안으로 스며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뜻을 옹골차게 이루어 가는 예배의 자리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집이 하나님의 법궤가 머무는 아비나답의 집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잃어버린 법궤의 시대를 지나 사라진 법궤의 시대를 넘어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이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와 더불어 신실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시대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5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