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오름교회

2021.05.09 움오름 주일 설교 - "한나가 기도하여"(삼상 1:1-2:11)

2021년 5월 16일 업데이트됨

삼상 1:1~2:11

1장

1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의 현손이더라2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3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4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5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6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7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8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9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10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1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2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13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14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15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16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17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18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9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20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21그 사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22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23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24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포도주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25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26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27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28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2장

1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2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3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4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5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8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9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10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11엘가나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설교문

1. 사무엘서를 열다

4주만에 룻기를 마치고 사무엘서를 시작합니다. 룻기처럼 사무엘서도 세밀하게 살펴보지는 않으려 합니다. 전체적인 내용과 함께 본문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적인 메시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먼저 사무엘서의 구조와 내용, 그리고 의미에 대해 잠깐 살펴본 후 오늘 본문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사무엘서는 사무엘 상(31장) + 사무엘 하(24장)으로 나눠 있습니다. 사무엘이 31일 한달 내내 이사(24)다니며 말씀 전했다고 생각하시면 쉽게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근데,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게 구분이 없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사무엘서입니다. 분량이 많아서 사울의 죽음을 기점으로 상권과 하권을 나눴습니다.

그럼 ‘사무엘상’, ‘사무엘하’라는 제목은 어떻게 붙였을까요? 주요등장인물이 사무엘, 사울, 다윗인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상’, ‘다윗하’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왜 위 세 인물 중에 가장 적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의 이름으로 명명했을까요? 그것은 최초 히브리어 성경이 앞부분의 주요인물 사무엘의 이름을 따서 지었기 때문입니다. 시원한 답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사시대를 마감짓고 새로운 시대, 왕정시대를 열도록 한 인물이 사무엘이었기에 그 이름으로 명명했던 겁니다.

사무엘서는 룻기 다음에 나오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사사기에 이어집니다. 마지막 단어가 ‘다윗(דָּוִד)’으로 끝나는 룻기는 사사기와 사무엘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패역한 사사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인 사무엘과 왕정시대를 여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런 사무엘서의 이야기를 누가 썼나, 언제 썼나? 이런 것들은 여러 전승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왜 기록했는지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의 시대배경은 여려 면에서 과도기이고, 변혁기입니다. 우선 정치체계가 사사시대가 막을 내리고 왕정체조로 전환됩니다. 구리를 녹여 농기계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던 청동기시대가 가고 철기시대로 바뀝니다. 이러한 전환과 변화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 해라, 저것 하지말라는 잠언식 교훈조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타의 이야기(마치 드라마 인물에 몰입하여 맞장구치고, 욕하듯이…)를 들을 때처럼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그 결과 사무엘서는 3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우리 이야기가 됩니다.

2. 1단락: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의 성장(2:12-2:26)

사무엘서는 사무엘, 사울, 다윗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그 시작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앞선 룻기가 여성의 이름, 그것도 이주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성경이었듯이, 사무엘서도 그 시작을 ‘한나’라는 여성을 그 중심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배치는 원복음이라고 불리는 창 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의 완전한 실현 이전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던 남성들이 망가뜨려 놓은 세상을 하나님께서 여성을 통해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질서한 시대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았던 한 여인을 통해 어떻게 변혁시키시는지를 들려줍니다.

그 변화의 시작은 다름아닌 한나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로부터 변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494km에 달하는 한강의 발원지는 ‘검룡소’라는 작은 계곡입니다. 강원도 태백에 있는 그 작은 곳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서울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을 열었듯이, 당시 무명의 한 여성이 드린 기도가 사무엘, 사울, 다윗이 등장하는 새시대를 열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가 하나님 앞에 드린 이 기도를 <이유, 특징, 결과>의 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한나 기도의 이유

일반적으로 옛날 이야기는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와 같은 형태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서의 한나 이야기는 구체적인 지역과 인물을 명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첫문장인 삼상 1:1엔 9개의 고유명사가 등장합니다. 그 중에 3개는 지역이름이고, 6개는 사람이름입니다. 지어낸 도덕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재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의도입니다.

그 이야기는 곧 2절을 통해 주인공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한나의 가정에 한 남편을 사이에 두고, 부인 2명이 있었는데,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오늘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왜 부인이 2명이었냐?”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워낙 시대와 사회 자체가 형사취수제도를 비롯해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제도에 있던 것이 아니라, 질시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결핍을 안고 살던 사람이 더 큰 아픔으로 내몰렸다는데 있습니다. 브닌나는 여러 자녀들로 인해 누리는 풍요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자녀도 없는 한나가 남편의 관심을 통해 위로받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한나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잔인하게 한나를 조롱하였습니다. 6절과 7절에 보면, 2번이나 ‘격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로 인해 한나가 얼마나 슬펐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묘하게도 5절과 6절에는 동일한 표현을 2번이나 사용하여 그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기인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하셨듯이, 라헬에게 하시고, 리브가에게 하셨듯이 일부러 막고 계셨던 겁니다.

분명 눈에 보이는 아픔은 격분케 하는 브닌나의 잔인한 행동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한나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브닌나와 싸우지 않습니다. 머리채를 쥐어잡고 누구 하나 죽자고 설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드리러 올라가던 실로에 가서 하나님 앞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이 한나로 기도하도록 만들었습니까? 그녀의 결핍입니다. 사실 결핍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문제 삼거나 조롱하지 않으면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계속 걸고 넘어지면서 조롱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내 존재의 이유까지 침범해 오면 어떻습니까? 이러면 그냥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지요. 이것을 브닌나가 담당했습니다. 6절에 보면, ‘적수’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가혹하게 건드렸습니다. 이러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우리의 기도는 생의 결핍으로 시작합니다. 심각한 그 결핍이 없다면, 누가 졸리는 몸을 깨워 새벽부터 기도하겠습니까? 아픔이 없고, 위협하는 존재가 없다면, 누가 늦은 밤까지 울부짖으며 기도하겠습니까?

2) 한나 기도의 특징(삼상 1:10-11)

오늘 본문 가운데 한나가 드린 기도는 2번 등장합니다. 삼상 1:10-11, 그리고 삼상 2:1-10입니다. 먼저 앞의 기도의 특징을 살펴본 뒤에 두번째 기도는 기도의 결과 이후에 마지막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한나가 기도하기 전 상황을 9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한나가 결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엘리는 성전 문설주 옆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엘리는 단 한 번도 일어섰다는 말이 없습니다. 앉아 있든지 아니면 누워 있습니다. 영적지도자로 있으면서도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한심한 제사장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런 가운데 한나가 결연히 기도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것은 앞으로의 일을 암시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0절 - 11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10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절: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나처럼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나처럼 기도하는 게 어떤 겁니까? 간절함입니까? 통곡입니까? 그렇게 오래 끈질지게 기도하면 열이면 열 모두 응답됩니까? 이루어 집니까? 물론 그런 간절함이나 오랜 기도가 필요없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분명 그렇게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한나의 기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2가지에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그녀의 간절함이나 통곡이 아니라, 그녀의 포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아기가 생기는 것을 막으시면서 계속 듣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포기였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자식없는 여인이 하나님 앞에 나가 눈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 통곡하는 기도 중에 한나가 깨달은 것은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없음으로 인해 아파하고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사람 없어서 고독하신 하나님을 본 겁니다. 그래서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제 몸으로 낳아서라도 제가 드리겠습니다라는 서원의 기도였습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 성소에 나가던 날, 이사야는 고독하신 하나님의 탄식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우리 중 누가 그 마음을 알고, 위로해 드리겠습니까?

3) 한나 기도의 결과

울며, 통곡하며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은 우리에겐 낯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3천년전 제의적 관습은 제사장을 통한 속죄와 기도를 드릴 뿐 성직자의 도움없이 개인이 성소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관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관습을 넘어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상황을 토로했습니다. 한나는 당시의 희생제사의식이라는 문법을 벗어나 하나님 앞에 기도한 처음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한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엘리가 참다 못해 나섰습니다. 그가 보기엔 그것은 성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였습니다. 그건 술주정꾼의 행위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성소에 그것도 대낮에 여인이 들어와 주사를 피우고 있다고 생각하여 한나를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엘리의 꾸지람을 들으며, 한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절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한나의 말을 들은 엘리는 종교적 형식주의를 끝까지 고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나를 축복하며 이렇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17절입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간절한 기도와 제사장 엘리의 축복기도 후에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8절은 그 다음 한나가 어떻게 했는지를 기술함으로써 한나의 신앙적 태도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18절 하반절입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기대가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믿는데, 마음에는 의심이 자리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설마 이게 되겠어?’하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 천사가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꺼내 주었습니다. 기쁜 마음에 베드로가 내달려 형제자매들이 모인 곳으로 갔습니다. 늦은 밤이었지만, 그들은 문을 걸어잠근 채 여전히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들은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너무 기쁜 나머지 문 여는 것도 잊은 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행 12:15입니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이게 딱 우리 수준이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기도하면서도 “네가 미쳤다”, “그의 천사라”하는 이런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도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금언같은 지침이 있습니다. “비가 오기를 기도했습니까? 그럼 우산을 준비하십시오” 이제 기대없는 기도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설마’하는 체념과 가정법을 버릴 때입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는 한나의 모습을 깊이 새길 때입니다.

19절 후반절은 기도 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절은 그 결과가 ‘사무엘’이라는 아들의 출산으로 나타났음을 알려줍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구한 대로 주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구하고, 믿은 결과입니다.

3. 한나와 사무엘 그리고 기도

삼상 1:21 이하를 보면, 엘가나가 매년 실로에 제사 드리러 가는 동안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드릴 준비를 합니다. 이 부분 또한 요즘 시대 우리의 문법으로 풀려고 하면 답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아니, 왜 자식의 장래를 부모가 결정해?’ … 전체적인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없던 때에,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늘 앉아만 있던 영적 게으름의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기도했던 여인이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대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고 양육하고 준비해 갑니다. 이게 포인트입니다.

유다 마카비2서 7:27에 아이가 젖 먹는 기간이 3년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한나도 사무엘을 적어도 3년을 이렇게 양육했습니다. 22절 뒷부분 한나의 말처럼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해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젖을 땐 후 서원한 대로 실로에 데리고 가 하나님 앞에 나실인으로 드렸습니다.

사무엘을 드린 후에 이어지는 삼상 2:1 이하의 한나의 기도를 자세히 다룰 수도 있겠지만, 시작할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핵심내용 위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로 시작해 ‘하나님’으로 깊어진 기도입니다.

: 삼상 2:1 한나의 기도는 유독 ‘나’라는 단어가 많습니다. ‘내 마음, 내 뿔, 내 하나님, 내 입, 내 원수들’. 한나의 개인적인 경험들입니다. 그런데 이 경험들이 모두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나’라는 중력을 뚫고 나가 ‘하나님'과 연결된 것입니다.

새벽에도 일어나 기도하는데, 기도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수개월째 짓누르는 생의 중력이었습니다. 무거워진 기도가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이런 것들을 뚫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러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통치)에 대한 신뢰입니다.

: 삼상 2:4-5을 보시면 상황이 바뀝니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힘의 균형을 뒤집는 주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극단적인 상황까지 미칩니다. 바꾸십니다. 삼상 2:7-8에 보시면 특별히 약하고 힘없이 살았던 사람을 ‘영광의 자리’로 옮기시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중요할 뿐 아니라, 제가 ‘최애’하는 히브리어 동사가 8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일으키시다’는 뜻의 동사 ‘קוּם’(쿰)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세운 ‘쿰아트’의 쿰입니다. 삼상 1:9에서는 한나가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삼상 2:8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으시키시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핍과 아픔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를 기도하도록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능력 밖의 일 앞에서 주저 앉아 있을 때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죽음 가운데 있던 나사로를 일으키셨듯이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 한나의 기도는 자신도 모르는 앞으로 올 왕정체제에 대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메시아’까지 확대됩니다. 그 안에서 장차 맞이할 자신의 승리를 ‘뿔’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노래합니다. 이 노래를 다윗이 삼하 22:3에서 계승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나 이후 1000년이 지난 후 유다 땅에 살아가던 여인 마리아가 그 기도를 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될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한나의 기도에 들어 있습니다.

4.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문법은 여전히 ‘설마’와 가정법에 묶여 있지는 않습니까? 한나는 결핍의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현재 어디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제사장 엘리처럼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요 5:8)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12살난 딸을 향해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막 5:41)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결핍의 자리에 주저 앉아있지 말고, “쿰”하라 하십니다. 생의 중력을 뚫고 하나님과 연결되라고 하십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가 소망이 없는 기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지 않는 기도, 체념의 기도가 아니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돌아보셨듯이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으로 인해 일어서기를 구합니다. 비록 결핍이 상존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으로 기도가 시작할지라도 우리의 기도는 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읽는 것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많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적은 이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한나와 같이 자녀를 하나님 앞에 준비시키는 부모로, 사무엘 같이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구별된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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