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오름교회

2021.05.02 움오름 주일 설교 - "생명의 회복자"(룻 4:1-22)

2021년 5월 10일 업데이트됨

룻기 4:1~18

1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2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3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4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5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6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7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8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9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10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11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12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13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14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15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16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17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18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19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20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21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22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설교문

1. 룻기 4장을 그리다

룻기의 마지막인 4장은 3개의 단락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째 문단은 1절 -12절입니다. 보아스가 이른 아침 성문 광장에 나가 10명의 장로들이 배석한 가운데 1순위자와 담판하는 장면입니다. 둘째 문단은 13절 - 17절입니다. 드디어 룻과 보아스가 결혼하고 아들이 태어나면서 동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셋째 문단은 18절 - 22절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낳은 아이가 어떤 의미와 위치를 지녔는지를 간단한 족보를 통해 보여줍니다.

2. 생명의 회복자

룻기 4장을 15절에 언급된 ‘생명의 회복자’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이 말은 동네 여인들이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을 두고 한 말이지만, 이 관점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춰보려 합니다.

1) 2순위자 -보아스

첫번째로 2순위자 보아스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룻에게 책임을 다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언약대로 날이 밝자 곧장 베들레헴 성문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며, 휴식터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장소로 사용되던 일명 나들목이며, 법정이었습니다.

룻 4:1은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1순위 ‘기업 무를 자’가 성문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 말이지요. 보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고 기다리던 그 사람이 마침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그의 이름을 불러 그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베들레헴 성읍의 유력한 장로 10명을 법률집회의 증인겸, 배심원으로 초청했습니다.

보아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연륜과 품성이 묻어 납니다. 그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심성을 지녔습니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매우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해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이미 파악했으며, 법적조치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향후 일말의 잡음이 나지 않도록 준비했습니다.

지난시간에 농촌에서는 일년 수입의 대부분이 전반기 밀, 보리 추수, 후반기 벼 추수 때에 들어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중요한 추수가 타작했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모아 담아야 하고, 또 햇볕에 말려야 합니다. 그래야 도정하기도 좋고, 보관하기도 용이합니다. 그렇다면, 타작이 끝난 아침에 얼마나 확인할 일이 많고, 또 지시할 일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보아스를 보십시오. 바쁜 일정 중에 사람에 대한 약속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중심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가 충분히 가늠됩니다.

룻기를 시작하던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사사기와 룻기는 같은 시대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삶이 다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사기의 삶’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지키지 않아도 여호와의 율법을 삶의 모본 삶아 사는 룻기의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사기는 구원의 거대담론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처할 때마다 마블의 영웅같은 사사들이 등장해 세상을 구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빈센조 까사노 같은 사람이입니다.

이에 비해 룻기는 어떻습니까? 평범하다 못해 최하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홀로된 노인, 홀로된 이주여성의 행위와 보아스라는 나이 지긋한 한 남성의 경건이 있을 따름입니다. 기적도 없고, 나라를 구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생기를 불어 넣습니다. 이것이 당시에는 어떤 의미와 무게를 지녔는지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뉴스를 보면, 유력 정치인이나 강대국의 지도자들에 의해 세상이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신실한 삶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그 삶을 통해 생명을 잇게 하십니다. 이것을 룻기가 보여줍니다.

2) 1순위자 -신 벗은 자

두번째로 1순위자 아무개입니다. 10명의 장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아스가 1순위자에게 나오미의 상황을 말했습니다. “모압지방에서 돌아와서 죽은 남편 소유의 땅을 팔려고 하는데, 당신이 최우선 대상자이고, 내가 그 다음이다. 근데, 내 뒤에는 아무도 없다.”(2-3절) 가련한 나오미에게 당신과 내가 유일한 희망이다는 말이었습니다.

보아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1순위자가 “내가 할게요!”라며, 자신이 나오미의 토지를 매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 토지와 더불어 죽은 친족의 아내였던 모압여인 룻까지 거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1순위자가 곧바로 말을 뒤집었습니다. 6절입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매우 계산적인 반응이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입니까? 물론 현재 이 부분을 읽는 우리가 도덕적인 잣대로 보면 그렇습니다. ‘아니, 친척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달랑 자신하고 보아스하고 둘 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저리 매정하고, 몰인정스러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잠깐 기업을 무른다는 것이 뭐길래 1순위자가 처음에는 한다고 했다가 금방 변심했는지 그 이유를 간략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집안에 울타리가 되고, 보호자가 될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 그 역할을 대신 하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나오미의 집안엔 아무 남자도 없고, 남편이 남긴 조그만 땅 밖에 없습니다. 그 땅을 지금 팔려고 하는데, 그게 다른 집안에 넘어가면 나오미는 영영 남의 집 품꾼이나 하인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친척들 중에 이 밭을 매입해 주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엘리멜렉, 말론, 기룐의 이름으로 후대에 상속해 주고, 그 집안 여성들도 거둬 줍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홀로 남은 여성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를 죽은 사람의 후손으로 키우는 겁니다. 자신이 돈 주고 매입했던 그 토지도 그 집안 이름으로 상속해 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망한 집안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걸 누가 해주겠습니까? 남 좋은 일 시키는 일이지요. 그래서 율법은 이것을 가까운 친척들에 한해 그 책임을 두었던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요, 그 시대 홀로 남은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헤세드였습니다. 하지만, 이 헤세드를 이행하는 것은 경제적인 비용을 치뤄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순위자가 순간 좀 전의 말을 뒤집고 변심한 겁니다.

1순위자의 이런 반응은 보편적이고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계산적이고, 수치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은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저울 위에 올려져 자신의 존재를 몇 kg인지 수치로 설명합니다. 자라면서 키, 몸무게, 시력, 지능 등을 측정하며 더더욱 수치와 밀접해 갑니다. 거기다가 학교생활이 어떤지에 대해선 숫자로 표시된 성적에 의해 평가받습니다. 옷을 사고, 신발을 사도 모두가 수치화 되어 있습니다. 먹는 음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g(그램), 또는 kg(킬로그램), cal(칼로리)로 수치화되어 있습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직장인의 능력도 얼마의 월급과 보너스를 받는지에 따라 평가받습니다. 그 집이 좀 사는지 아닌지는 아파트 평수가 몇 평인지에 따라 판가름 납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예외가 아닙니다. 교인수가 몇명인지에 따라 목사의 급이 분류됩니다. 이 모든 것이 숫자를 신뢰하고, 숫자를 숭배해 온 결과입니다.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도 이런 면에서 보면 그냥 세상의 시류에 따라 계산적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 입장에선 선택할 때 가장 먼저 돈이 보인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상황에서 계산기를 두드린 그 사람을 외면하셨습니다. 바보스럽게 숫자를 넘어 룻을 사람으로 본 보아스를 주목하셨습니다. 1순위자는 이름을 굳이 표시할 필요조차 없는 ‘아무개’였지만, 하나님의 법을 의식하며 헤세드를 선택한 사람은 ‘보아스’로 또렸히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의 법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의 신을 벗겼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을 벗는 경우가 모두 4가지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하신 거룩한 곳에서 신을 벗었습니다(출 3:5, 수 5:15).

2) 애곡할 때 벗었습니다(삼하 15;30).

3) 포로나 노예가 신을 벗었습니다(대하 28:15, 사 20:2).

마지막으로 계대결혼의 의무를 거부하는 남편의 형제에게 홀로 된 여성이 모욕의 상징으로 그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룻 4:7에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거부한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라는 부분은 신을 벗는 4번째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는 마땅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끄러워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다지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신발을 벗어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스에게 건넸습니다. 10명의 장로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이 일이 곧 베들레헴 온 성에 전해질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크게 문제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손해될 일을 막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을테니까요.

우리도 숫자와 떨어져 살 수 없는 세상을 삽니다. 생명, 사람이라는 부분에 의식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 역시 숫자에 함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산적이 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사람을 봐도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숫자로 보입니다. 이익이냐, 손해냐로 나눕니다. 그 결과 생명은 언감생심하고 숫자 하나하나에 바들바들 떨다가 제대로 사람다움을 살지 못하다 갑니다.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래야 숫자의 지배와 시대의 관성에 쏠려 앞으로 넘어지거나, 뒤로 쓰러지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룻

세번째로 룻입니다. 보아스와 결혼한 룻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룻 4:13은 이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이것을 신앙의 고백적 표현이라 한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일 수도 있습니다. 보아스의 나이가 많았기에 자식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도록 하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전 하나님께서 반드시 먼저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시고, 사람을 준비시킨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사람으로 인해 한 시대가 바뀌고 다른 시대가 열렸습니다.

특별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가임상태를 벗어난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하시거나, 일부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막고 계시다가 정하신 때에 나게 하심으로 역사적 전환을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이삭의 부모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가 그러하였고,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 부부가 그러하였고, 사무엘의 부모 엘가나와 한나가 그러하였고, 세례요한의 부모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한 경우인데,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

이 땅에 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엔 세상을 바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고, 그 뜻에 따라 특별하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갈아탄다는 과도기적인(transitional) 사람이 아니라 궁극적인 변화와 탈바꿈을 이끄는(transformational)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저평가 해서도 안되고, 다른 누군가를 함부로 이야기해서도 안될 일입니다. 이와 관련해 탈북학생들을 가르치는 여명학교 교장 선생님(조명숙)이 얼마 전에 들려주신 다음과 같은 글이 떠올랐습니다.

<폭력상태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아이들>

코로나로 인하여 북한주민들의 탈북이 어려우니 탈북여성들이 낳은 중국출생 자녀들이 여명학교의 반(1/2)을 이루고 있다. 이 중국출생 아이들이 참 딱하다. 그 아이들은 내게 “선생님,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났지만 우리는 폭력적인 상태에서 태어났잖아요.”라며 울먹였었다.

자존감의 원천은 사랑이다. 사랑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아이들의 자존감은 낮았고 그 어떤 상담적 스킬이나 인간적인 위로도 온전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것보다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이 결핍이 해결된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스스로 ‘어쩌다 태어난 인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폭력으로 태어난 인생이라고 한정짓는 사람을 통해 이 땅에 만연한 폭력을 갈아 엎어(transformational)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아픔을 알기에 그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갈 동역자로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땅의 폭력을 끝내고 생명의 회복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아이의 이름은 부모나 조부모가 짓습니다. 성경에서 아주 특별한 경우 하나님께서 지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니 특이하게도 이웃의 여성들이 ‘오벳’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이는 봉사하는 자, 섬기는 자, 또는 종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성경에서 오벳의 뜻이 들어간 경우가 '에돔의 종’이라는 ‘오벳에돔’이 있고,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의 선지자 ‘오바댜’가 있습니다. 이처럼 종, 섬기는자라는 이름을 이웃 여성들이 붙인 것은 어쩌면, 소망없던 나오미에게 후손이 생겨서 노년에 잘 됐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과거부터 후손은 어른에 대한 봉양의 책임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이제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의미에서 봉양자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17절 뒷부분은 ‘그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는 부분을 부연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은 나오미 한 사람의 부양자가 아니라, 다윗을 태어나게 함으로 온 이스라엘을 위한 생명의 부양자, 회복자가 되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을 홀로된 여인, 모압 이주여성 룻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룬 일이었습니다.

3. 죽음에서 생명으로

룻기의 첫 장은 3명(엘리멜렉, 말론, 기론)이 죽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룻기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4:22)은 3명(오벳, 이새, 다윗)이 태어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룻기는 ‘죽음으로 시작해 생명으로 마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구원과 생명과 헤세드의 이야기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세상은 온통 죽음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몇명이 코로나에 걸렸고, 몇명이 죽었다가 중심을 이룹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생명의 회복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족보는 온통 ‘죽었고, 죽었고…’로 끝나지만,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는 모두가 ‘낳았고, 낳았고’로 전개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룻기는 이런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완전히 망가져 소망없던 한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헤세드 안에서 생명을 회복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눈에 띄는 영웅도 없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개입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어두운 시대를 밝히며 살아간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명의 역사를 이뤄내시는지를 들려 줍니다.

현재 우리 시대는 여호와 신앙을 믿는 것이 고루하고, 비이성적이다고 취급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분위기가 룻과 보아스가 살았던 사사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시대가 어떠하고, 신앙을 어떻게 취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푯대 삼고, 그 말씀에 순명해 가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통해 세상의 틀과 꼴을 바꾸며 변화시켜(transformation) 오셨습니다.

이 명징한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시대를 걸어가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가정이 더더욱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가득하기를 기원드립니다. 가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전환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두운 그림자, 침울한 역사가 덮었던 시간들이 생명으로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죽음의 이야기를 생명의 이야기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비움의 이야기를 채움의 이야기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마라의 인생을 나오미의 인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룻기를 통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평범한 우리의 손이 세상의 틀을 바꾸는 하나님의 손이 되게 하시고, 소박한 우리의 걸음이 사람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발이 되게 하시고, 조그마한 우리의 삶이 세상을 돌보는 하나님의 증거 되게 하옵소서.

숫자가 지배하고, 숫자를 숭배하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을 섬겨가는 생명의 부양자, 이 시대의 룻과 보아스로 끝내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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