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오름교회

2021.03.07 움오름 주일 설교 -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4-25)

요한복음 21:24~25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5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설교문

1. 증언하고 기록한

2015년 3월 14일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써 움오름교회가 시작했습니다. 창립예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일마다 요한복음을 강해했습니다. 6년 만에 마무리 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24절-25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이 부분은 요한복음 21장의 기록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의 기록자가 당연히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려주는 중요한 것이 바로 24절에서 사용된 시제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기에 원문의 문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는 원문이 Οὗτός ἐστιν ὁ μαθητὴς ὁ μαρτυρῶν περὶ τούτων καὶ ὁ γράψας ταῦτα(후토스 에스틴 호 마데테스 호 마르튀론 페리 투톤 카이 호 그랍사스 타우타)입니다. 이 문장에서 2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증언하다’와 ‘기록하다’입니다. 이 두 동사가 시제가 각각 다릅니다. ‘증언하고’라는 μαρτυρῶν(마르튀론)은 현재 능동 주격 남성 단수형이고, ‘기록한’이라는 γράψας(그랍사스)는 과거 능동 주격 남성 단수형입니다.

다시 말해,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은 동일한 남성 단수입니다. 이 사람이 현재 증언하고 있는데, 기록은 과거에 이미 했다고 합니다. 이를 반영해 윗 구절을 재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 일들을 기록했던 이가 현재 살아서 이 일에 관해 지금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 1장-20장까지의 기록자와 21장의 기록자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요 21:24은 모두 동일인인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고, 증언을 당시 현존상태에서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베드로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간 요한의 사역이 보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길은 요 21:15-17에서 보듯이, 주님께서 3번이나 반복해서 당부하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에게 주어진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일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베드로전후서를 보면, 실제 베드로는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중심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교회의 목양현장을 책임졌습니다. 이와 달리 요한은 잠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함께 했지만, 이후 줄곧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다 마리아 별세 후 비로소 나이든 상태에서 에베소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다 밧모섬에서의 유배를 겪었고, 요한복음에 이어 요한 서신과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이른바 큰 목회의 현장에서 많은 이들을 섬기는 목양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적은 이들을 섬기는 목양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어떤 이들은 학교에서, 또 어떤 이들은 거리와 쪽방촌, 또는 공장과 일터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만나고 섬깁니다.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신실하게 감당해 가면 됩니다.

이 말씀을 드리다보니 순간 안타까왔던 20년전 한 사건이 스쳐갑니다.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오시범을 보인 예로서 타산지석 삼았으면 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있지 않아 동기들이 월요일에 한 동기가 소속되어 있는 당시 유명했던 교회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마침 그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요청해 동기모임에 좋은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대학교목실에 근무했던 저는 그날 쉬는 날이 아니었기에 출근해서 교목실장 선배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퇴를 한 뒤 부지런히 달려가 참석했습니다.

도착해서 얼마있지 않아 교회 안팍에서 나름 유명했던 그 담임목사가 문을 열고 모임장소에 들어 왔습니다. 앞에 서서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17명이었습니다. 얼굴 표정이 굳어진 그는 자신이 그날 새벽부터 무엇을 했는지부터 해서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결론인즉, 그렇게 바쁜 사람인 자기에게 겨우 17명이 모여 시간을 내달라고 하니 기가 차다며 예의없는 사람들이라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더니 교회에서 밥은 줄테니 그것 먹고 가라고 하며 자신은 그냥 나가 버렸습니다.

숫자가 적으면 더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그는 알지 못했나 봅니다. 대중을 상대로 하던 그는 소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봅니다. 지금 그는 은퇴했으나 가끔씩 언론을 통해 그의 말은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이후 그의 책과 언어를 무게있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관심받는 일에, 많은 사람이 요청하는 일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요구됩니다. 그는 그의 길을 가면 되고, 저는 제가 걸어야 할 길을 가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께도 교회 개척한지 몇년 만에 몇 천명이 모였고, 목회가 어떻게 성공적이었는지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그들대로 가는 길이 있고, 움오름교회는 우리대로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작년 후반기에 교회에서 저소득층 예술지원사업과 예술가 지원사업을 위해 쿰아트를 세웠습니다. 아직 팬더믹 상황이 계속 되고 있지만, 실제적인 실적물이 나오도록 지난 1월부터 관계한 분들이 열심이 준비하고 추진 중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는 대단한 일이나 주목받는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자원을 활용해 우리의 길을 가면 됩니다. 비록 베드로의 일처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는 일이 아니고, 당장 열매를 맺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요한에 의해서 복음서에 이어 요한서신과 계시록이 기록되었듯이 우리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가 증언되고 말씀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2.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증언한 일에 대해 24절 후반절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가장 주목받는 것은 사도요한의 지도를 받던 ‘요한공동체’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두를 보면, 예수님에 대해 설명한 뒤에 요 1:14에 이르러,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신앙공동체가 있었음을 표현했습니다. 같이 봉독해 보시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처음과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신앙공동체를 나타내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로써 요한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가 신앙고백의 증거로 요한복음의 기록된 내용을 믿고 따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사도 요한의 증언을 진실되고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생을 바쳐 기록하고 증언한 내용이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 들여지고, 전해지고, 전파되는 것이 아름답고 부러워 보입니다. 공동체의 규모가 크고 작고, 모인 사람이 많고 적고를 떠나 구성원들이 얼마나 그 증언의 말씀을 토대로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심각하게 지난 6년 동안 제가 증언했던 말씀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물론 제게도 전화를 하시거나 문자를 통해서 <이번주일 설교 중에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다. 어느 것이 새로왔고, 감동이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동기목사(방주교회 김상윤 목사) 중에는 유명한 목사들 설교는 듣지 않는데, 움오름교회 설교는 챙겨본다고 합니다. 어떤 동기 형(다운교회 석정일 목사)은 자기 교회에 영화감독을 준비하는 청년에게 우리교회 홈페이지를 알려주며 가서 설교를 들어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제게 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힘을 넘어서 저로 하여금 왜 이 일을 하는지 의미를 찾고 보람되게 하는 것은 제가 속해 있는 신앙공동체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누고 증언하는 말씀을 통해 함께 자라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서 가는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 제게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이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음주일부터 1달간 저는 설교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저를 돌아보려 합니다. 저의 증언이 우리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 되도록 새롭게 하려 합니다. 이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3.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인 요 21:25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에 동의하십니까? 스코틀랜드 출신의 저명한 성서신학자였던 윌리엄 버클레이(William Barclay, 1907-1960)는 요 21:25을 읽고 그 감동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붓을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그에 대한 단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경이로운 일들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앞으로 체험할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카테고리들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에는 무력합니다. 인간의 책들은 그리스도를 담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아릴 수 없는 승리, 다함이 없는 능력, 그리고 제한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지고 자기의 복음서를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는 은혜가 다함이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사랑하십시다. 더 알아 가십시다. 더 깊이 믿어 가십시다.

인간의 책들은 그리스도를 담기에 부족하다는 버클레이 박사의 말이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3절입니다.

Could we with ink the ocean fill, And were the skies of parchment made,

우리가 잉크로서 바다를 채우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만들 수 있어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Were every stalk on earth a quill, And every man a scribe by trade;

땅에 있는 모든 줄기가 펜촉이 되고 모든 사람이 서기관이 되어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To write the love of God above Would drain the ocean dry;

높은 하나님의 사랑을 쓸려면 (잉크의)바다가 말라 없어지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Nor could the scroll contain the whole, Though stretched from sky to sky.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펼치더라도.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전 사랑을 못담네,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은 다함이 없습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고 높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부족함이 없는 은혜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더 알아가셨으면 합니다. 더 깊이 만나고, 더 깊이 교제해 가셨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헤아릴 수 없는 승리, 다함이 없는 능력, 그리고 제한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겁니다.

4. 도달하게 하시리라

1974년 스위스 로잔(Lausanne)에서 세계순복음전도대회가 열렸습니다. 그곳에서 한 여성이 찬양을 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출신의 입양자였고,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킴 윅스(Kim Wicks), 한국전쟁(6.25)때 시력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미국의 신실한 크리스천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공부한 그녀는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하여 저명한 성악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빌리그램 전도단에서 찬양 사역자로 섬겼습니다.

그날 로잔대회에서 킴 윅스가 불러 유명해진 찬송가가 바로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THE LOVE OF GOD)’입니다. 킴 윅스(Kim Wicks)는 빌리 그래함 목사와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찬양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간증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더 주님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녀의 간증입니다.

"사람들이 앞을 못보는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뛰라,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 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귀하신 움오름가족님들~

우리 또한 앞이 보이지 않는 1년여를 걸어 왔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만큼 이렇게 보이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변함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길의 빛이 되시고, 발의 등불이 되셔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언젠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좋은 곳으로 우리를 도달하게 하실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에, 그 사랑에 의지해 매일매일의 삶을 살아가시길 권면드립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각자의 삶으로 쓴 복음서의 마지막 21:25에도 이와같이 고백되기를 기원드립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귀하신 우리 하나님~

지난 6년 동안 모자람 많은 인간의 언어와 표현 속에서도 말씀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답답하셨을텐데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완주토록 붙들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도구된 인간의 유한함 너머에서도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줄 알기에 이후의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친히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주시길 빕니다.

함께 6년의 시간을 겪으며, 견디며 이 자리까지 오신 움오름가족님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채워줌보다는 모자람이 많고, 부족함이 상존하는 교회 속에서 함께 신앙을 하고자 결심한 귀한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비록 갖춘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어느 곳에서도 누릴 수 없는 것을 이곳 움오름에서 향유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뿐만 아니라, 모자라고 척박하기에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주님께 삶을 맡김으로 자신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곳에 다다르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헤아릴 수 없는 승리, 다함이 없는 능력, 그리고 제한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모두의 고백이 요 21:25의 고백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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