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오름교회

2020.12.20 움오름 주일 설교 - "예수님의 탄생과 좌정하심"(눅 2:1-7)

누가복음 2:1~7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설교문

안녕하세요?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질서대로 잘 흘러서 우리를 또 성탄절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가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이지만 해마다 그 느낌과 생각들이 다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번 성탄절이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바가 있으신가요? 성탄절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탄생과 사랑, 희생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그 사랑과 그 희생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고 그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제국하에 있던 모든 지역에 호적조사를 명했습니다. 호적조사를 통해 세금을 걷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명에 따라 다윗의 가문에 속했던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다윗왕의 출생지였던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이미 임신하여 해산이 가까웠습니다. 요셉과 임신한 마리아는 여러 날에 걸쳐 힘들게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고 보니 먼저 온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여관방을 다 차지해버렸습니다. 임신한 마리아가 들어가서 아기를 낳을 방이 없었습니다. 이때 이들의 사정을 딱하게 어떤 이가 자신의 동굴 마굿간을 빌려주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동굴 마굿간에서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은 천사 가브리엘이 지으라고 알려준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이러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의 뜻을 이루시려고 사람의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동굴 마굿간의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상상해보겠습니다.

마굿간 안의 모습은 어떤가요? 돌로 이루어졌고 그리 넓지 않습니다. 마굿간 안의 냄새를 한번 맡아보세요. 어떤 냄새들이 맡아지시나요? 거기서 지내던 짐승들의 몸 냄새, 그리고 그들이 아무렇게나 배설해놓은 오물들...이것들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납니다. 또 여기저기 지푸라기들이 널려있어 어지럽습니다. 구석구석 오래된 먼지들과 여기저기 치우지 않은 배설물들로 더럽습니다. 또 그것들에 공생해 살고 있는 작은 벌레들까지. 세상에 더러워도 그렇게 더럽고 추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라면 잠깐 들어가 있는 것도 싫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아기로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화려한 왕궁에 태어나도 부족하신 분이 더럽고 추한 동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제가 본문을 묵상하는 중에 상상으로 동굴 마굿간을 바라보면서 “아~동굴 마굿간이 얼마나 누추하고 더러운가? 악취가 나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 동굴 마굿간이 내 영혼의 모습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동굴 마굿간과 같지 않은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악취가 나는가? 동굴 마굿간의 추함과 더러움은 죄로 가득한 모든 인간의 내면이었습니다.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의 상징이요 비유였습니다. 죄악이 가득한 이 동굴 마굿간, 이 인간 세상으로 죄와 도무지 관계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는 더러움과 악취 가득한 동굴 마굿간을 상상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 싫은데 하나님께서는 동굴 마굿간과 같은 세상 한복판에 스스로 들어오셨습니다. 점도 흠도 없이 거룩하신 분께서 이 죄악으로 충만한, 죄악 자체인 세상 안으로 오시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셨을까요? 이것은 마치 어떤 새하얀 것이 완전히 까만 어떤 것 위로 떨어질 때 느낌과 같을까요? 거룩하신 예수님의 자기부인이 새롭게,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동굴마굿간 같은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보다 우리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동굴 마굿간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사건은 내 영혼 안에서, 우리 모든 인간들 안에서 일어나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추하고 더럽고 악취 가득한 동굴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것은 동굴 마굿간보다 더 더럽고 추한 내 안에서도 탄생하시길 원하심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질 때 우리 안에서 이런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오, 주님 그렇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동굴 마굿간보다 더 더럽고 추한 죄인입니다. 저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듯이 제 안에도 탄생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은 2000년 전 베들레헴, 어느 초라하고 더러운 동굴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은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기 원하십니다. 동굴 마굿간보다 더 더러운, 죄의 악취 풍기는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추하고 더러운 동굴 마굿간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선택하시어 탄생하신 것처럼 내 죄악의 추함과 더러움을 피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길 원하십니다. 나의 죄의 더러움을 씻겨주시고, 죄의 악취를 제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저는 동굴 마굿간보다 더 더럽고 추합니다 고백하는 심령에 탄생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니시고는 나에게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고백하는 영혼에 찾아오십니다. 예수님, 제 마음이 너무 공허합니다. 제 마음의 동굴이 텅 비었습니다. 무엇으로도 이 마음의 동굴을 채울 수 없습니다. 제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저를 만나주십시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심령에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사실로서, 이 진리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오늘은 내가 네 안에서 태어나길 원한다. 동굴 마굿간에서 처럼 네 안에서 태어나길 원한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탄생하시지 않으시면 나의 신앙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앙꼬없는 찐빵을 먹으면서 “나는 찐빵을 먹었어, 찐빵 맛있어”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나에게 그저 성경의 지식으로만 있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탄생 하지 못하셨다면 내 신앙에 의문을 품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혹시 교회만 다니는 사람은 아닌가?” 2,000년 전 동굴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 심령 안에서 탄생하십니다. 우리에게 그 실재로서 찾아오시고 만나주십니다. 우리는 많은 신앙인들로부터 그들이 귀로만 들었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셨는지 간증하는 것을 듣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예수님 만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학교를 오고 가는 길에 늘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지금은 작고하신 가수 최희준님의 “하숙생”이라는 노래입니다. 저는 비록 어렸지만 이 노래 가사가 제 마음에 너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마음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저는 골목길을 걸으며 이 가사에 제 마음을 담아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 골목길과 그때의 감정이 기억납니다. 저는 비록 10대 중반의 아이였지만 인생의 의미가 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이후로 철학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제가 은행에서 근무를 했는데요. 아침에 출근해서 은행 문을 오픈하기 전에 제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까뮈의 자살론을 떠올렸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죽고 싶다” 라는 마음이 아니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출근해서 일하고 또 집에 가서 자고, 또 아침에 일어나고 일하고 자고... 내 삶이 이렇게 다람쥐 체바퀴 돌 듯 똑같이 반복된다면 지금 죽는 것이나 더 살고 나이 들어 죽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제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28살 때, 폐결핵과 결핵성 늑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은행에 3개월 휴직계를 내고 쉬면서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서 18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 토기장이 집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1절부터 한 절 한절 읽어내려 가는데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이 말씀을 읽는 중에 갑자기 제가 아직 읽지도 않은 그 다음 내용들이 한순간에 들어오면서 그 의미가 확 깨달아졌습니다. 아직 읽지도 않은 말씀의 그 의미가 한순간 통째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제 눈에서 눈물이 터졌습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저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성경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제가 늘 품었던 질문의 답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왜 사는지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노래했고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 힘들어 했던 제게 예수님은 인생의 의미라는 답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토기장이고 너는 내 손안에 진흙이야. 토기장이가 그 손에 들린 진흙덩이를 가지고 자기가 선하게 여기는 대로 그릇들을 만들듯이 나 또한 너에 대해 선한 뜻과 계획이 있단다. 내가 선하게 여기는 대로 너를 만들거야.”

이 말씀의 의미가 제가 미처 읽지 못한 4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 내 인생에 의미가 있었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 선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어.

저는 교회를 초등학교 때부터 그때까지 20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제 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님과 연결 지어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삶의 의미도 내 안에서 스스로 찾으려 했고 제 인생의 의미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의 의미와 답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책 속에만 계셨던 하나님, 문자로만 계셨던 예수님께서 제게 그 존재로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후에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게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 의미없이 회색빛이었던 세상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조차 반짝거렸고 모든게 살아서 저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 다 존재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볼 때마다 눈물겨웠습니다. 또 그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 외웠던 주기도문을 그냥 외울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단어 한 단어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눈물이 쏟아졌고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만나는 이마다 예수님 믿으라고 얘기하고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예수님’라는 말만 하면 울었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다가도 예수님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 후로 더 시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는 말씀들을 묵상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채찍질 당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조롱당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당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죄 때문인 것을 알기에 너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예수님께 울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왜 저를 사랑하세요? 사랑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이렇게 고통당하시잖아요. 저를 그냥 사랑하지 마세요”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 지었으니까“ 그 순간 제 안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내가 너 지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이토록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저는 그때 “지독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그가 천하의 죄인일지라도 오히려 그를 품고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거라고 차라리 나를 벌해달라고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처럼, 너를 내가 지었어 그래서 너를 포기할 수 없어 나는 너에 대해서 사랑밖에 몰라. 하시는 것입니다.

낳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지은 사랑”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나를 지으셨기에 내가 동굴 마굿간보다 더 비참한 죄인일지라도 결코 나를 포기할 수 없는사랑,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시는 사랑,

제가 예수님의 나를 지으신 사랑을 깨닫고 저는 예수님을 더 깊이 저의 구원자로서 제 삶의 주인으로 제 안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저의 인생의 의미에 대한 답을 가지시고 또 나를 지으신 사랑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경 문자가 아닌 나의 구주로서 제 안에 탄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험이 있으세요?

저나 다른 성도들의 간증 같은 예수님 탄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늘 내 마음 안에서 거짓없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동굴 마굿간보다 더 더럽고 추한 악취나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내게는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드리는 고백이 있고 이 믿음이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탄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탄생하시지 않고서 이 불의하고 연약한 우리가 이런 믿음의 반석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가랑비에 옷 젓듯이 내가 크게 깨닫지도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조금씩 내 안으로 스며드신 것입니다..

만일 어제는 그런 것 같은데 오늘은 아닌 것 같은 흔들리는 믿음, 내 감정에 기반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런 채로 내 평생 성탄절을 맞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 구절을 외워서 구원받을 수 없고 성탄절 예배를 평생 드렸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이 과연 누구신가? 나는 동굴 마굿간 같이 더러운 죄인이요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창조주 거룩한 하나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 이 천지가 진동할만한 은혜로서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 이 진리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 이 믿음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도 한 영혼 안에 탄생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낳은 후에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님을 다시 상상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 예수님을 잠잠히 바라보세요. 아기 예수님을 마음으로 느껴보세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다가오세요? 구유 안에서 예수님은 편안하시고 평화롭다고느껴지시나요? 그대로 10초 동안만 머물러볼까요? 잠깐이지만 어떠셨어요?

제가 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볼 때 제 안에서 이런 질문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 저를 사랑하세요? 그 하늘 보좌와 그 영광을 다 버리실만큼요

예수님, 저를 사랑하세요? 저를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실만큼요

예수님, 저를 사랑하세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악 세상에 오실만큼요

예수님, 저를 사랑하세요? 의인도 아닌 완벽한 죄인인 저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실만큼요

예수님은 저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세요?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을 보세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아기로 누워 계셔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조차 못하는 완전한 자기 비움과 희생을 하셨으니까요. 그 높은 하늘 보좌와 영광 다 버리시고, 의인도 아닌 완벽한 벽한 죄인인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살려고 태어나는데, 예수님은 죽으시려고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우리였습니다. 오직 나 하나만을 원하셨습니다. 나를 얻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셨어요. 나를 얻는데, 우리를 구원하는데 자신이 하늘과 땅에서 가진 모든 것을 버리시고 바치셨습니다.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나는 예수님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직 나 하나만을 원하셨는데 나는 예수님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있는가?

사람들로 꽉찬 여관처럼 내 안에 예수님 아닌 다른 것들로 꽉 차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만으로는 만족이 안되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을 똑같이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뉘이신 구유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구유 가운데 뉘이셨습니다. 구유는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 모셨습니다.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은 구유 안에서 평화로우시고 예수님을 모신 구유도 예수님과 함께 평안합니다. 예수님과 구유는 서로 안에 일치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 모신 저 구유가 나이고 우리여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뉘이신 것처럼 내 마음의 구유에 예수님께서 좌정하시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3: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갈2:20절에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심령 그 깊은 곳으로부터 바라고 소원하고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해서 그는 세상 어떤 것도 다 배설물로 여겼고 그가 가진 것을 기꺼이 모두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것처럼 그도 예수님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 한분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린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 한 분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심령 안에 탄생하시고 마음의 구유에 거하시는 이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놀라운 신비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알 수 없는 이 신비 안에서 살아갑니다.

바울이 배설물들이라고 칭했던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의 구유에 좌정해 계시지 않으면 그 마음에는 결코 평안과 만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도 종종 이런 것을 경험합니다.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왠지 공허하고 허전해집니다.

개그맨 박명수씨를 잘 아시죠? 그는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인기, 명성을 다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개뼈다귀”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님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얻고, 내 앞에 있는 것을 얻으면 당장은 기쁜데 그 감정은 금방 사라지고 오히려 더 큰 공허감이 온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남자 나이 50대는 자식 크는거 보는게 행복이냐?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거, 남들이 부러워하는거 다 가졌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지? 왜 거꾸로 공허감이 더 커지지? 이 분의 의문과 감정이 뭔지 이해하시겠어요? 여러분은 이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해주시겠어요? 우리의 마음은 결코 그런 배설물들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마음의 블랙홀만 만들뿐입니다. 우리 마음 구유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의 구유에 좌정하셔야 비로서 우리의 마음에 마르지 않는 평화와 행복의 샘이 만들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 보기에 그는 이보다 더 가난할 수 없고 그를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와 온통과 고난과 눈물뿐인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기뻐했고 어떤 것에도 감사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구유에 모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전 존재로서 그리스도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직 나만을 원하셨듯이 나 또한 그리스도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내 심령 깊은 곳을 차지하시고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차지하시어 그분께서 나를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시여 나를 온통 차지하소서. 저에게는 오직 당신과 당신의 사랑만을 주소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동굴 마굿간과 같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심만이 아니십니다. 동굴 마굿간과 같이 죄악된 내 영혼 안에 거룩으로 탄생하시고 마음 구유에 영원하신 주님으로 좌정하시기 위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망극하신 이 사랑과 은혜를 머리 숙여 받아들이는 자, 예수님은 그 안에 구주로 탄생하시고 영원히 주님으로 좌정하십니다.

이 거룩하신 참 뜻을 우리가 다시 깨닫도록 예수님께서 이 성탄절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 성탄의 참 뜻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원하셨던 이용도 목사님(1901-1933)이 계십니다. 이 분의 기도를 우리도 함께 드리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베들레헴, 작고 추한 말구유를 허물치 않으시고 거기 나신 예수님이여

나의 작고 추한 마음 구유에 탄생, 좌정하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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